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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호칼럼] 그림으로 재탄생한 ‘청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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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0-09 23:17:29 수정 : 2016-10-09 23: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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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서정시집 발간 70년 맞아
7명의 화가 시각예술로 표현
극단의 반목·광기의 현시대에
인간본연의 길 지표로 영원하길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합동시집 ‘청록집’이 올해 70주년을 맞았다. 해방 직후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순수서정시를 표방한 시집이 발간됐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이 시집이 후일 20세기 한국현대시의 전반과 후반을 잇는 중요한 문학사적 의미를 갖게 됐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청록집’은 박목월의 ‘임’ 외 14편, 조지훈의 ‘봉황수’ 외 11편, 박두진의 ‘향현’ 외 11편의 시가 수록된 작은 시집이다. ‘지용시선’을 먼저 간행한 정지용의 권유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을유문화사에서 근무하던 박두진이 실무를 맡아 진행했다고 한다. 이들이 함께 시집을 낸 것은 모두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지를 통해 등단했기 때문이다. 정지용은 거슬러 올라가면 1930년대 시문학파를 주도한 시인이며 그들의 목표가 ‘저절로 외워지며 피에 새겨지는 시 그리하여 민족 언어의 완성’을 지향하는 시였다면 청록파의 시적 목표 또한 경향파의 시가 아니라 ‘민족시의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해방 정국의 혼미 속에서 탄생한 ‘청록집’이 발간 70주년을 맞아 그림으로 재탄생했다. 김덕기, 김섭, 박영근, 서용선, 윤후명, 이인, 최석운 등 화가가 시를 그림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시와 그림은 예로부터 하나라고 주장돼 왔지만 언어예술을 시각예술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다양한 화풍을 지닌 화가의 눈에 비친 시는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은 흥미로운 관심거리이다. 지난 4일 청록파를 회고하는 자리와 함께 개최된 ‘시 그림’ 개막전에 우리는 회화로 표현된 시의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박목월 시를 담담하고 밝은 필체로 그린 최석운, 조지훈의 시를 굵고 진한 먹 선으로 그린 서용선, 박두진의 시를 해체적 필법으로 그린 박영근 등 모두 개성적인 색과 필체를 보여주고 있었다.

최동호 경남대 석좌교수·시인
시를 해석하는 것은 화가의 독특한 시선에 의해서이지만 때로는 시에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자신의 화풍만을 내세운 것 같은 일부 그림에 아쉬움이 남은 것도 사실이다. 그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시인이자 화가이며 목월의 제자이기도 했던 윤후명의 ‘청노루’ 그림이었다. 노루 뿔에 느릅나무 싹을 그려 넣어 시적 이미지를 충실히 반영하고자 한 것이 눈에 띄었다.

아버지를 회고하는 자리에서 조지훈의 삼남 조태열은 막내아들을 보고 싶다는 마지막 말씀을 가족 중 누구도 이해하지 못해 전해 주지 않았고 그로 인해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면서 유고시 ‘병에게’를 낮은 목소리로 낭송해 청중을 숙연하게 했다. 박목월의 장남 박동규는 가족에게는 무심하고 친구에게는 헌신적이었던 아버지를 회고하면서 시인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존재인 것 같다고 했다. 1942년 봄 자신의 고향 건천역에서 지훈을 처음 만나 서로 단번에 알아보고 보름 이상 술을 함께하고 경주의 유적을 유람하면서 울분을 토로하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감동적으로 이야기했다. 목월의 추천으로 등단한 유안진 시인은 추천을 받기 위해 한양대 연구실로 처음 목월을 만나러 갔다가 문패를 확인하고도 너무 어려워 노크를 하지 못하고 문 앞에서 오래 기다리던 시절을 회고했다.

청록파 세 분 중 가장 먼저 지훈이 세상을 떴고 그다음이 목월(1978), 마지막이 두진(1998)이다. 1968년 5월 지훈의 영결식장에서 음울한 목소리로 조시를 읽던 목월의 목소리는 대학생이었던 필자의 뇌리에 지금도 생생하다. 세 분의 우정과 상호 존중은 지금의 시단에서 찾아보기 힘든 인간적 향취가 있었다. 이제 70년의 세월이 축적되면서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청록집’은 후학들에게는 순수서정시의 한 전범으로 읽혀지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극단의 반목과 광기의 시대 앞으로 과연 ‘청록집’이 어떤 의미를 지닐 것인가. 머지않아 인공지능(AI)이 지배하는 세상이 오더라도 청록파의 시는 인간성 상실을 치유하고 인간 본연의 길로 이끄는 지표로서 갱신하는 생명력을 가질 것이다.

최동호 경남대 석좌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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