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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을 쓴 가왕의 노래를 듣는다. ‘동방신기’의 노래 ‘주문’을 그 가왕은 자신만의 감성과 끼로 마음껏 부르고 누린다. 제법 야한 가사를 그가 아무리 목청껏 질러도 에로틱하기보다는 애틋하다. 길게 늘이는 어떤 대목을 살짝 감아올려 마무리하는 부분은 판소리나 흥타령의 맺힌 옹이로도 다가온다. 저리 ‘샤우팅’을 하는데도 애틋하다니, “넌 나에게 빠져, 나에게 미쳐”라고 외쳐대는 저 아우성을 들으면서도 서글프다니, 분명 나이 탓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지난 일요일 해외에서 시인 소설가 14명이 서울에 왔고 한국에서는 다시 14명의 문인들이 서로 짝지워진 이들을 만나 어제까지 대학로에서 ‘수다’를 떨고 밤에는 낭독극장을 열었다. 지난밤에는 김선우 시인의 위안부 관련 장시를 들었고 리을무용단의 춤을 보았다. 열네 살짜리 소녀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고, 그 여인은 ‘오래된 오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오래된 그 열네 살 소녀가 꿈처럼 나타나 늙은 그네를 따뜻하게 뒤에서 감싸안는다. “물젖은 삼베 찢고 넋배를 몰아가요. 그대 몸속 나 어린 여자들의 혼령과 함께.” 껴안는 소녀나 등을 맡긴 여인 모두 깊이 눈을 감았다.

저 열네 살 소녀시절에 동방신기 같은 아이돌이 있었다면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그 세대 그 시절 정서에 어울리는 다른 버전의 애틋한 사랑노래가 있었을 것이다. 동방신기 노래를 들으면서 엉뚱하게 서러워하듯 어떤 이미지와 정서가 그 노래의 배면에 깔려 있느냐에 따라 당연히 듣는 이들의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가왕의 노래솜씨가 서러움을 촉발시킨 혐의도 있지만, 지난밤 듣고 보았던 열네 살 소녀의 찢겨진 몸이 노래마저 그리 들리게 만들었을 법하다.

지금 세종시 영평사에 가면 절 주변은 물론이고 장군산 전체가 구절초로 뒤덮여 있다. 들국화 종류 중 하나인 구절초는 하얀 이파리와 노란 암술이 소박하고 정겨운 꽃이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고 외친 ‘무식한 놈’의 시인도 있지만 그리 자책할 건 없다. 소박한 흰 옷을 입은 가을꽃 구절초는 어젯밤 본 열네 살 소녀를 많이 닮았다. 그 소녀도 참혹한 기억에서 벗어나 동방신기 노래에 맞춰 막춤이라도 출 수 있다면 좋을 것을, 온 산 뒤덮은 구절초처럼 흔연히 너울거릴 날 생전에는 올까. 가왕, 노래를 계속 불러줘, 서럽지 않게.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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