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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로버트 김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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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0-01 01:12:21 수정 : 2016-10-01 0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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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수사관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그의 손에는 차가운 수갑이 채워졌다. 미국 해군 정보분석관으로 일하던 그는 그날로 모든 것을 잃었다. 북한 잠수함의 강릉 앞바다 침투사건 등에 관한 정보를 한국에 넘겼다는 죄목이었다. 다른 우방국들에게 제공되던 정보였지만 스파이라는 오명이 그에게 씌워졌다. 재미교포 로버트 김의 이야기다.

1996년 가을에 시작된 수감생활은 8년간이나 계속됐다. 살림살이는 집세를 내지 못할 정도로 기울어져 파산선고를 당했다. 아내는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주말마다 300㎞를 달려 남편의 감옥을 찾았다. 왕복 8시간이 걸리는 고행길이었다. 그와 아내의 머리에는 어느새 하얀 눈꽃이 피었다.

로버트 김의 한국 이름은 김채곤이다. 조국을 위해 인생을 바쳤지만 그의 이름은 조국에서 잊혀졌다. 긴 수감기간 동안 정권이 세 번 거쳐갔지만 그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었다. 그가 체포될 당시의 대통령은 “개인적인 문제로 한국 정부와 관계없다”고 발을 뺐다. 후임 대통령은 북한을 의식해 고개를 돌렸다. 정보 유출로 무기형을 받은 유대인 한 명을 구하려고 총리까지 나선 이스라엘과는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국을 버릴 수 없었다. 감옥에서 풀려나자 조국의 지인들에게 이메일 편지를 띄웠다. 안보를 비롯해 교육, 정치, 역사, 시민의식 등에서 문제 인식과 발전 방향을 담은 내용이었다. 조국을 향한 일종의 ‘러브 레터’였다. 최근 그는 8년간 띄운 425통의 편지 중에서 80여통을 추려 ‘로버트 김의 편지’란 책으로 엮었다.

책이 나오기에는 재벌 회장의 숨은 선행이 있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로버트 김이 감옥생활을 시작한 그해부터 출소 때까지 8년간 남몰래 김씨 가족의 생활을 도왔다. 겨울에는 방한용 모자와 목도리를 감옥으로 보냈다. 책의 출간도 김 회장의 경비 지원으로 가능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선생님께 조국 사랑에 빚을 졌다”고 말했다. 어디 김 회장뿐이겠는가.

“부잣집에 시집온 가난한 처녀가 친정식구의 어려운 소식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조국을 위해 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국가안보가 님비로 멍든 오늘, 그의 뜨거운 나라 사랑에 마음이 무겁다.

배연국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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