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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14〉 동물과 교감한 숙종

입력 : 2016-09-30 21:19:05 수정 : 2016-09-30 21: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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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 존중한 참된 동물사랑… 오늘날 동물학대 반성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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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면 비단 휘장에 숨고 낮이면 숲에 숨으니/자취가 어찌 그리도 교묘하고 음흉한가?/너를 부른 사람도 없고 네가 올 이유도 없는데/뾰족한 부리로 침상이며 베개 옆을 침범하누나.”

조상들은 날씨의 변화를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 주둥이도 삐뚤어진다’고 했다. 더위에 기승을 부리는 모기도 처서가 지나고 날이 선선해지면 제 힘을 쓰지 못한다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올여름은 1994년 이후 20년 만에 가장 무더웠다고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무더위에 비가 적게 내려 모기로 인한 고생은 덜했다.

앞의 시는 숙종이 지은 ‘모기를 미워하는 노래’이다. 모기를 미워하며 지었다지만 실제로 모기가 죽이고 싶도록 밉다기보다 그저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라고 느끼는 듯하다. 궁궐이라도 당시에는 숲도 많고 연못도 있었으니 모기가 극성을 부렸을 것이다. 숙종은 그런 모기를 조금은 해학적이고 조금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숙종이 잠들어 있는 명릉. 재위 중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환국을 여러 차례 단행해 비정한 임금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숙종은 누구보다 동물을 사랑하고 교감했던 군주였다.
◆송아지 울음소리에 우유 마다한 숙종

숙종(재위 1674~1720)은 조선의 19대 임금으로, 이름은 순(焞)이다. 재위 기간에 여러 차례 집권 세력을 교체하는 환국(換局)으로 많은 이가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인현왕후(仁顯王后)는 쫓아내고 희빈장씨(禧嬪張氏)를 중전에 앉혔다가 다시 인현왕후를 중전에 복위시키는 등 왕실이 어지러운 시기이기도 했다. 사극이나 영화에서 숙종은 비정하고 줏대 없는 임금으로 묘사된다. 심지어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에서는 아편중독자로 표현됐다. 그러나 14세에 왕위에 올라 47년간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제도와 문물(文物)을 혁신하여 조선후기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국왕으로 평가받는다.

공적 존재인 국왕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숙종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인간으로서 면모와 성품을 살피는 것은 숙종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숙종은 어느 임금보다 가족을 사랑하고 동물을 기르며 교감한 임금이었다. 모기마저도 남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만큼 타고난 성품이 다정다감했다. 숙종의 행장(行狀·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에는 어릴 적 기르던 참새 새끼가 죽자 묻어주도록 하고, 내국(內局·내의원)에서 우유를 취하는데 송아지의 슬픈 울음소리를 듣고 불쌍히 여겨 우유를 들지 않았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동물과 다른 사람의 본성 중에 하나인 ‘인’(仁)은 다른 생명을 나의 생명과 동일하게 여기는 생명의지가 발현되어 확산하는 것을 말한다. 그 대상이 사람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다. 송아지의 사정을 불쌍히 여기어 우유를 빼앗지 않는 것도, 참새의 죽음을 불쌍하게 여겨 묻어주도록 하는 것도 바로 인의 발현이다.

숙종의 글을 모은 문집. 동물을 사랑했던 숙종은 기르던 고양이가 죽자 잘 묻어주도록 하고, 그 이유를 밝힌 글을 문집에 남겼다.
숙종의 어진 성품이 동물사랑으로 나타난 대표적인 사례는 기르던 고양이를 묻어준 일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내가 기르던 고양이가 죽음에 사람을 시켜 싸서 묻도록 하였으니 귀한 짐승이라서가 아니라 주인을 따랐음을 아끼기 때문이다. ‘예기’에 이르길, “해진 수레 덮개를 버리지 않는 것은 죽은 개를 싸서 묻기 위함이다”라고 하였고, 그 주에 “개와 말은 모두 사람에게 도움이 있으니 그런 까닭에 특별히 은혜를 보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양이가 비록 사람에게 도움은 없으나, 짐승일지라도 주인을 따름을 안다면 그를 묻어 알림은 지나친 것이 아니라 마땅한 것이다.”

숙종의 문집에 있는 ‘죽은 고양이를 묻다’라는 글이다. 숙종이 고양이를 기르게 된 연유는 자세하지 않지만 고양이가 죽자 잘 싸서 묻어주도록 하고, 그 이유를 글로 남겼다. 옛날 공자가 죽은 개를 묻어주기 위해 다 해진 수레 덮개를 버리지 않았던 것은 개나 말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궁궐에서 기르는 고양이는 개나 말과 다르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동물은 아니다. 그럼에도 숙종이 귀한 동물도 아닌 고양이를 묻어 준 것은 자신을 주인으로 따랐기 때문이다. 지극히 높은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동물을 직접 길렀다는 것도 놀랍지만 죽은 참새나 고양이를 묻어준 것은 더욱 대단한 일이다.

기르면서 교감하고 가족처럼 여기는 현대의 동물사랑을 숙종은 이미 300년 전에 실천한 것이다. 요즘 기르던 동물을 내다버리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기도 한다. 처음에 예뻐하다가 이내 싫증내고 귀찮아져 버리는 세태에 정성으로 동물을 기르고 죽은 뒤에는 위로하는 글을 지은 숙종의 마음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본성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동물 사랑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 동물을 사랑하는 것일까. 모든 동물을 가까이에 두고 매만지며 예뻐하는 것이 동물사랑일까. ‘토끼를 기르며’라는 글이 있다. 숙종에게는 중국에서 돌아온 사신이 바친 토끼가 있었다. 사신으로 가서 얻은 신기한 물건, 동물을 돌아와 임금에게 올리는 것이 상례였기에 아마 토종 토끼가 아니라 외국의 품종이었을 것이다. 숙종은 예뻐하며 추운 날씨에 혹시 탈이 날까 염려하여 따뜻한 밀실에 두었더니 며칠 뒤에 죽고 말았다. 추운 것을 좋아하고 따뜻한 것을 싫어하는 토끼의 성질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뒤 다시 토끼를 얻어 정원의 섬돌 사이를 마음껏 노닐게 하였더니 6년을 살고도 병들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생명에는 각각의 본성이 있고, 그 본성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 숙종은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무지를 탓하며 스스로 반성하였다.

궁궐 연못에서 기르는 원앙을 보며 지은 글도 있다.

“한번 궁궐 안에 들어오더니/한가로운 정원에 죄수처럼 갇혔구나./기른다고 일찍이 날개 끝을 잘라냈으니/돌아가고자 해도 다시 방법이 없구나./이미 무리와 이별하지 않았건만/어찌 머무는 것을 싫어하는가?/먹이를 날마다 배불리 먹고/새매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옛날에는 야생의 원앙을 잡아 정원의 연못에서 기르던 취미가 있었다. 원앙의 깃털 끝을 잘라 날아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전시’(剪翅)라고 한다. 숙종이 거처하던 궁궐 안 연못에 원앙이 살고 있었는데, 역시 전시를 당한 것이라서 죄수처럼 갇힌 채 다시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였다. 먹이 걱정도 없고 새매의 위협에서 안전하다 해도 그것이 원앙의 편안한 삶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느새 우리의 삶에서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개와 고양이는 물론이고 고슴도치, 햄스터, 관상용 새들, 심지어 뱀까지도 집 안에서 기르는 세상이다. 밖으로 나가면 동물원 우리 안에는 온갖 야생의 동물들이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동물들은 본래의 야성을 잃어버린 채 사람이 만들어 놓은 사람의 공간에서 사람의 생활패턴에 순응하고 있다. 사람들은 보이는 모습 뒤에 숨은 부작용은 모른 척한다. 얼마 전 수족관에서 갇혀 지내다 다시 바다로 돌아간 ‘춘삼이’라는 돌고래가 자연에서 새끼를 낳은 것이 확인되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인간에게 동물은 감정을 교감하는 측면보다 개는 도둑을 막아주고 고양이는 식량을 축내는 쥐를 잡는 그야말로 실용적인 기능성이 강하였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동물은 본래적 기능은 거의 사라지고 인간의 정서적 안정을 우선하는 하나의 가족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옷을 입히고 털이며 발톱을 깎기도 한다. 그것이 어찌 동물을 위한 것이겠는가. 생명을 장난감이나 요깃거리로 여기는 우리의 이기심은 아닐까? 사람은 사람대로 동물은 동물대로 각기 자신의 영역에서 마음껏 살아가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끔찍한 동물학대, 숙종은 무어라 일갈할까

숙종은 너무 엄중하여 무서울 것 같은 궁궐에서 기르는 닭과 병아리가 돌아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며 즐겼다. 직접 참새며 토끼며 고양이를 기르고, 죽은 고양이를 묻어주며 글을 남기기도 했다. 또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어도 주인을 알고 따랐기에 마땅히 묻어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동물을 대하고 기르는 정성을 숙종에게서 찾을 수 있다.

날개 끝이 잘린 채 궁궐에 갇힌 원앙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한편으로 토끼를 섬돌 사이를 마음껏 뛰놀게 하는 모습에서 어떤 것이 동물을 사랑하는 올바른 방식인지 반성하게 된다. 단지 동물을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각각의 본성에 맞게 살아가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 숙종의 마음을 통해 동물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다. 조선시대보다 많은 면에서 발전되었다고 하는 요즘, 끔찍한 모습으로 소개되는 동물 학대의 사례를 숙종이 본다면 뭐라 하셨을까.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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