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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13〉조선 사람들의 조상 받들기, 추증과 분황

입력 : 2016-09-23 21:41:01 수정 : 2016-09-23 21: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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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부모·조상에도 관직… 가문 드높인 최고의 효도 ◆조선시대 사람들의 조상 받들기, 추증과 분황

조선시대 사람들은 과거에 합격하여 입신양명하는 것과 함께 조상을 받드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묘소를 관리하는 데 힘썼으며, 또한 조상의 명예를 높이는 데 노력하였다. 조선시대에 돌아가신 조상들을 받들고 높이는 방법 가운데 추증(追贈)과 분황(焚黃)이 있었다. 추증은 2품 이상 고위 관원에 대하여 돌아가신 부·조·증조 3대의 품계와 관직을 올려주는 제도이며, 분황은 추증으로 인하여 조상이 품계와 관직을 받았을 때에 그 후손이 무덤에서 황색 종이의 임명장을 태우는 의식이다.

추증은 조선 초기부터 시행되었고 일부 변화하는 단계를 거쳐서 단종 때 확립되었으며, 성종 연간 ‘경국대전’을 통해 법제화되었다.

“종친 및 문관·무관으로 실직(實職) 2품 이상인 자는 3대를 추증한다.〔부모는 자신의 품계를 준하여 추증하고, 조부모와 증조부모는 각각 1품씩을 강등하여 추증한다. 죽은 아내는 남편의 직품에 따라 추증한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2품의 관원으로 임명되면, 국왕은 해당 관원의 부·조·증조를 추증하였다. 이때 부모는 본인과 동일한 품계로 추증하였고, 조부모는 본인보다 1등급이 낮은 품계로 추증하였으며, 증조부모는 본인보다 2등급이 낮은 품계로 추증하였다. 또한 죽은 아내의 경우에는 남편의 품계에 해당하는 외명부의 품계로 추증하였다. 추증의 결과물로 국왕은 해당 관원에게 선대의 추증교지(追贈敎旨)를 내려주었다.

분황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중국의 분황 제도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주자(朱子)는 분황을 묘소에서 거행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말하였고, 사당에서 분황을 거행하는 것이 올바른 의례임을 언급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시호(諡號)에 대한 분황을 거행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1408년(태종 8) 9월에 명나라 황제가 태조 이성계에게 ‘강헌’(康獻)이란 시호를 내렸는데, 이때 태조의 위패를 모신 문소전에서 명나라 황제의 고명(誥命)을 분황하는 제례를 거행하였다. 조선 초기에 사당에서 거행되었던 분황은 조선 중·후기로 갈수록 묘소로 점차 자리를 옮겼다. 사당에서는 추증된 사실을 조상들에게 고하는 고유제를 거행하였고, 고유제를 거행한 후에 신주에 기재된 관직을 지운 후에 새롭게 추증된 관직을 기재하였다. 이어서 조상의 묘소에 가서 추증교지를 읽고 그 부본(副本)인 분황교지를 불태우는 분황을 거행하였다. 조상의 분황을 거행하기 위하여 해당 관원은 국왕에게 휴가을 청하는 정사(呈辭)를 올렸고, 이에 국왕은 경국대전에 규정된 7일의 휴가를 주었다.

추증과 분황은 부·조·증조가 추증된 관직으로 인하여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인물로 격상되기 때문에 국가에서 내려주는 한 집안에 내려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즉, 본인이 2품 이상의 고위 관원이 되어 가문을 빛낸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추증과 분황의 혜택을 받은 조상들로 인하여 집안이 번성하고 가문의 위상이 격상되었다. 또한 추증된 조상들로 인하여 주변에서 자랑스럽고 훌륭한 후손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지역사회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790년 안극 추증 교지/1790년(정조 14)에 안극을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광평군에 추층하는 추증교지이다. 안정복이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법전에 따라 안정복의 부친 안극이 추증되었다.
◆추증 관직은 가문에서 원하는 대로


그렇다면 실제로 부·조·증조를 추증하는 관직은 어떻게 결정되었을까. 이와 관련해서 조선 중기의 문신 유희춘(柳希春·1513~1577)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에서 유희춘의 부·조·증조를 추증하는 내용을 통해 추증 관직을 결정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유희춘은 1571년(선조 4) 2월 4일에 종2품의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후에 2월 11일 일기에서 유희춘은 부·조·증조를 추증할 관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 부친은 마땅히 이조참판으로 추증해야 하고, 조부는 마땅히 좌승지가 되어야 하며, 증조부는 마땅히 좌통례가 되어야 하니 빛나는 영광이 어찌 다하겠는가. 엎드려 생각하건대 부친께서 매번 말씀하시기를 ‘점쟁이가 내 운명이 2품으로 추증될 것이다’고 하셨으니 이제 와서 슬픔 감정을 이기지 못하겠다. …”

유희춘은 3월 3일에 이조좌랑에게 선대의 추증을 말하면서 구체적으로 추증할 관직을 직접 요청하였고, 3월 5일에 부·조·증조의 추증교지를 받게 되었다. 교지에서 유희춘의 부친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조부는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으로, 증조부는 통례원 좌통례로 각각 추증되었는데, 유희춘이 2월 11일의 일기에서 희망했던 관직과 동일하였다. 특히 유희춘은 문관의 임명·공훈·평가 등을 등을 담당했던 이조, 왕명의 출납을 담당했던 승정원, 국가의 의례를 관장했던 통례원을 추증 관직으로 선호하였다. 유희춘의 사례를 통해 볼 때 추증된 관직은 2품으로 임명된 당사자가 결정하였기 때문에 각 가문마다 희망하는 관직이 서로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1893년(고종 30) 김해 분황교지. 규격 24.0×38.6㎝
◆학문과 덕행, 특별한 추증의 사례


조선시대에 2품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임명되지 않았어도 국가에 큰 공을 세우거나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경우에도 추증되었다. 이와 같이 특별히 추증되는 사례로 오천(烏川) 광산김씨 가문에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1516~1577)의 추증을 볼 수 있다. 김부필은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적으로 이황의 인정을 받았으며, 이후 학행이 널리 알려져서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김부필의 추증은 시호(諡號)를 받는 과정 속에서 함께 진행되었다. 1816년(순조 16) 김부필의 시호를 요청하는 상소가 올라왔고, 시호를 논의하는 과정 중에 예조에서 김부필을 정경(正卿)으로 추증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후 몇 년간의 논의가 이어지다가 1822년(순조 22)에 김부필은 정2품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김부필의 추증교지에는 기존의 추증교지와는 다른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즉 이황으로부터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과 영남의 참된 선비인 것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1545년 7월 1일에 인종(仁宗)이 승하한 이후에 매년 인종의 기일인 6월 그믐날에 안동부의 거인리(居仁里) 산속에 있는 부친 김연(金緣)의 재실에 가서 밤중에 곡을 시작하여 새벽이 되어 돌아온 일을 언급하였다. 또한 조정의 부름을 마다하고 학문과 덕행에 힘쓴 김부필의 행적을 강조하면서 특별히 정경의 증직을 시행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김부필의 추증은 2품 이상의 관원이 아닌 경우에도 추증된 사례를 보여준다. 제도적으로는 국가로부터 시호를 받는 과정 속에서 시호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하여 추증되었다. 또한 김부필의 학문적인 업적이나 뛰어난 덕행으로 인해 추증을 받았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인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분황교지가 남아있는 이유는


분황교지(焚黃敎旨)는 대부분 분황 의식을 거행하였기 때문에 남아있지 않지만, 오천 광산김씨 가문에 김해(金垓·1555~1593)와 부인 진성이씨(眞城李氏)의 분황교지 2점이 전해지고 있다. 김해와 진성이씨의 분황교지는 추증된 관직과 ‘시명지보’(施命之寶)의 어보는 동일하였지만, 문서의 규격에서 차이를 보인다. 김해의 추증교지는 세로 55.8㎝ 가로 76.7㎝인데, 분황교지는 세로 24.0㎝ 가로 38.6㎝로 분황교지는 추증교지의 약 4분의 1 크기에 해당하였다.

김해는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예천에 있는 왜군을 공격하였다. 이듬해 5월에 밀양으로 진을 옮겨 왜적을 방어하였고, 6월에 부인 진성이씨의 장례를 치르고 진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경주에서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1595년(선조 28)에 김해가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에 순절한 의로움을 생각하여 특별히 승의랑 홍문관수찬에 추증하였다. 이후 300여년이 지난 1893년(고종 30)에 김해는 정2품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김해가 이조판서로 추증된 이후에 분황은 2년 후인 1895년(고종 32) 2월 17일에 거행되었다.

그렇다면 김해의 분황교지를 태우는 분황 의식이 실제로 거행되었는데, 김해와 진성이씨의 분황교지가 왜 남았을까.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해본다. 첫째는 조선 후기에 분황을 실제로 거행하지 않고 선대의 묘소에서 제사만 거행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둘째는 어보가 안보되어 있는 분황교지 대신에 다른 부본의 분황교지를 태웠을 가능성도 있다. 두 가지 모두 명확하지 않지만 광산김씨 이외에 다른 가문에 남아있는 분황교지가 발견된다면, 이 분황교지의 미스터리가 언젠가는 풀릴 것으로 보인다.

노인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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