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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노부부의 보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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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8-29 21:04:00 수정 : 2016-08-29 22: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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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녘 하늘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초저녁이었다. 퇴근길 홀로 서울 용산가족공원에 들렀다. 파란 풀밭엔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로 요란했다. 유독 한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산책길에 나선 노부부의 모습이었다. 아내의 거동은 몹시 불편해 보였다. 오른손에 지팡이를 든 아내의 보폭은 기껏 10㎝ 정도였다.

늙은 남편은 아내에게 팔을 빌려주고 천천히 보조를 맞췄다. 남편의 팔과 다리와 눈은 온통 아내에게로 향했다. 그 장엄한 삶의 행진에 나의 발걸음도 덩달아 느려졌다. 노부부를 도저히 앞지르지 못한 채 뒤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팽이처럼 바삐 돌던 지구도 어느새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이윽고 주차장에 도착한 남편은 평생의 동반자를 차 뒷자리에 조심스레 앉혔다. 그 모습에 취해 두 분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았다. 때마침 서녘 하늘에 서성이던 황혼의 햇살이 차의 꽁무니를 쫓아가며 반짝거렸다.

달포 전 페이스 북에 올린 글이다. 그때 나는 감히 노부부에게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전 롯데그룹 이인원 부회장의 죽음을 접하고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공원에서 마주친 늙은 남편은 바로 이 부회장이었던 것이다. 그는 매일 오후 6시에 귀가해 아내에게 밥을 떠먹여줬다고 한다. 어스름 저녁에 부인을 데리고 산책하거나 근교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교통사고를 당한 아내를 위해 10년 넘게 해온 병수발이었다. 그런 아내를 이승에 두고 떠나는 순간, 그에게 얼마나 아내의 얼굴이 밟혔을까.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미국 사상가 랠프 왈도 에머슨이 설파한 성공의 정의다.

이 부회장은 롯데그룹 2인자로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비록 불행한 삶으로 마감했지만 그가 울림을 주는 것은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인간적인 삶이다. 단 한 사람을 위해 삶의 보폭을 맞춘 늙은 남편에게서 ‘진정한 성공’의 고동을 듣는다.

배연국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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