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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10〉연암 박지원은 왜 열하까지 사행했을까

입력 : 2016-08-26 20:55:01 수정 : 2016-09-05 10: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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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제 여름 행궁서 ‘휴양지 정치’… 견문 넓히고 정세 파악 기회 올여름은 기상관측 사상 가장 고온의 불볕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 즈음에 가장 간절한 것이 더위를 피하는 ‘피서’일 것이다. 북경에 있던 청나라 황제들도 열하(熱河)에 있는 행궁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 여름을 나곤하였다. 열하는 지금의 헤베이성 북부 청더시에 속해 있으며, 베이징에서 동북으로 약 250㎞ 거리에 위치해 있다. ‘열하’라는 명칭은 피서산장으로 유입되는 하천이 겨울에도 얼지 않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열하는 1703년 이곳에 행궁을 짓기 시작한 이래 청나라 말까지 번영을 누려 베이징 다음가는 정치 중심지가 되었다.

조선시대 중국에 파견된 사절 중 열하의 피서산장을 방문한 사례는 모두 3차례이다. 1780년과 1790년 청 건륭제(재위 1735~1796)의 70세와 80세 탄생일인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사행이 있었고, 1860년 9월 영불 연합군의 베이징 침략으로 함풍제가 열하에 오랫동안 머물자 조선에서 황제의 안위를 묻기 위해 1861년 ‘열하문안사’를 파견하였다. 


19세기 후반 열하의 피서산장과 외팔묘 전경을 그린 미국의회도서관 소장의 ‘열하행궁전도’. 열하의 피서산장은 강희제 이래 청나라 황제들이 여름 피서와 정무를 보던 행궁이었다.
◆처음으로 열하에 도착한 조선 사절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위의 사례 중 1780년 건륭제의 70세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한 첫 번째 사행을 배경으로 저술되었다. 당시 사행에서 박지원은 정사 박명원의 자제군관으로 동행하였다. 1780년 8월 1일 박지원 일행은 여느 조선 사절과 같이 중국 사행의 최종 목적지인 베이징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건륭제는 5월 22일부터 베이징을 떠나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머물고 있던 터였다.

이에 건륭제는 이례적으로 조선 사신에게 열하까지 와서 만수절 하례 표문을 전달하도록 하였고, 8월 5일 정사 박명원은 부사 정원시, 서장관, 통역을 담당한 대통관 3명 등 총 74명을 꾸려 황급히 베이징을 출발하였다.

베이징에서 동북으로 회유, 밀운, 고북구를 거쳐 열하까지 5일 동안 밤낮 없이 달린 길 위에서 조선 사절단은 ‘진공(進貢)’ 깃발을 꽂은 채 황제에게 바칠 공물을 싣고 사방을 가득 메운 수레와 노새·말·낙타 등의 방울 소리, 벌판을 울리는 채찍 소리에 압도당하였다. 또한 원숭이와 표범, 타조 등 조선에서 보기 어려운 이국적 짐승을 비롯하여 보물, 옥기, 산호수(珊瑚樹) 같은 진귀한 공물도 구경할 수 있었다.

1780년 8월 9일 열하에 도착한 박명원 일행은 베이징의 체제를 본떠 1779년 준공된 열하 국자감(태학)의 행각과 재실에서 8월 14일까지 6일 동안 머물렀다. 건륭제는 조선 사절이 열하에 들어오자 고위관료인 군기대신을 보내 맞이하게 하고, 8월 12일 청의 3품 이상 대신들만 관람 가능한 무대 공연을 조선 사신들도 함께 관람하게 하였으며, 특별히 하유하여 조선의 공물을 견감하라는 칙지를 내렸다. 8월 13일 황제의 만수절 축하 의례에서도 조선 정사 박명원은 청 조정 2품 대신 반열 끝에, 부사 정원시는 3품 대신 반열 끝에 서게 하는 등 각별히 배려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소장한 박지원의 ‘열하일기’ 필사본.
◆열하에 조성한 청 황제의 여름 행궁, 피서산장

열하의 피서산장은 강희제(재위 1661~1722) 이래 청 황제들이 여름 피서와 정무를 보던 행궁으로 매년 3~4개월을 이 곳에서 체류하였다. 열하에 행궁 건축이 발달된 배경은 베이징과 멀지 않은 거리로, 과거 한족과 유목민족 사이 무역과 문화교류가 활발하여 교통 및 전략적 요충지였고 경관이 빼어났기 때문이었다. 1780년 열하까지 동행한 박지원은 청 황제들이 피서산장에 거둥하는 표면적 이유는 피서였지만, 그 실상은 이곳이 북쪽 변방의 요새로 몽고의 인후를 막는 동시에 황제가 자주 왕래함으로써 북쪽 오랑캐를 경계하기 위한 것임을 꿰뚫어 보았다.

1703년 짓기 시작한 열하 행궁에 1711년 36경이 조성되어 강희제가 어필 편액을 내리면서 비로소 ‘피서산장’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강희제는 재위 동안 베이징에서 열하까지 56차례 순력하였고, 목란위장(木蘭圍場)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사냥한 것도 40회에 이른다. 강희연간부터 베이징에서 목란위장 사이에 다수의 행궁이 조성되었으며, 대규모의 열하 행궁은 1792년 건륭연간에 완성되었다. 피서산장 서북쪽에 조성된 목란위장은 청조의 사냥터 중 가장 큰 규모로 1681년 몽고의 각 부족들이 진상한 부지로 조성되었다.

목란위장 조성 후 강희제는 청조를 위협하는 북부 변방을 안정시키고 팔기군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매년 이곳에서 몽고 부족들과 만주 팔기군을 거느리고 가을사냥을 거행하였다. 목란위장은 사냥을 통한 팔기 병사들의 군사 훈련 장소이자, 몽고 부족들에게 청의 전투력을 시위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건륭제 역시 강희제의 정책에 따라 재위기간 동안 피서산장에 52차례 머물렀고, 매년 가을 20~30여 일 동안 목란위장에서 대규모 사냥을 39회 거행하였다. 건륭연간, 열하까지 순력하였던 주요 목적은 북방의 위협 세력이었던 몽고를 복속시키는 한편, 실제로 건륭연간 금천·준부·회부 등의 정벌 시에 군사적 동력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청의 대국적인 입지를 공고화하기 위해 이 곳에서 황제가 티베트, 몽고, 조선국, 영국 등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정치적 무대였다.


정은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열하의 외팔묘에서 만난 티베트 판첸라마

열하의 피서산장 외곽에 조성된 외팔묘(外八廟)를 비롯한 12개 황실사찰은 티베트 불교가 청조에 확산되는 중요한 매개가 되었으며, 라마교를 신봉하는 티베트와 몽고를 회유하기 위한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1713년 피서산장에 조성한 최초의 사원 부인사(溥仁寺)는 1712년 내몽고에 지은 회종사(?宗寺)에 이어 티베트 불교를 숭상하던 몽고족을 회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건륭제는 피서산장 밖 동부와 북부 산록에 1755년에서 1780년에 걸쳐 보녕사를 비롯한 보우사·나한당·광안사·수상사·광연사·보타종승지묘·수미복수지묘에 이르는 외팔묘를 조성하였다. 이들 사찰에는 티베트 라마승들이 상주하였으며, 티베트·신강·몽고 양식과 한족의 건축양식을 반영하여 종교를 통한 청조의 민족 융합 정책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그중 수미복수지묘는 1780년 건륭제의 70세 만수절을 축복하러 열하에 온 티베트 6세 판첸라마(Lobsang Palden Yeshe·1738~1780)를 영접하기 위해 티베트 시가체에 있는 타쉬룬포 사원을 본떠 세운 사찰이다. 중심 건물인 대홍대가 둘러싼 3층의 묘고장엄전(妙高莊嚴殿)은 판첸라마가 경전을 강했던 곳으로, 지붕을 덮은 황금빛 기와 위에 8마리 황금빛 용을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판첸라마는 달라이라마에 버금가는 티베트 제2의 지도자로 1780년 5월 그가 피서산장에 올 때, 붉은 법의에 황색 계관을 쓴 게룩파 라마승 수천명이 수행하였다.

조선 사신은 1780년 8월 12일 건륭제의 명령으로 수미복수지묘에서 판첸라마를 만났다. 당시 건륭제와 황자까지 판첸라마에게 예를 갖춰 머리를 조아렸으나, 조선 사신들은 판첸라마에게 예를 표하라는 청 예부상서의 말을 짐짓 모른 체하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박지원은 청 건륭제가 티베트 판첸라마를 법사(法師)로 섬기는 실상이 종교를 이용하여 사방을 제어하는 교묘한 방법임을 간파하였다.

당시 조선 삼사는 판첸라마에게서 선물받은 호신용 동불(銅佛), 서장향, 붉은 탄자, 목에 둘러 축복해주는 까탁 등을 관소인 국자감에 가져가지 못하고 역관을 시켜 은 90냥에 팔게 하여 마부들의 술값으로 주려 하였으나, 마부들마저 이를 거부하였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인들에게 변방 이교(夷敎) 승려에게 예를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선물 받은 종교적 기념물은 상서롭지 못하고 처치 곤란한 물건으로만 간주되었던 것이다. 정사 박명원과 부사 정원시가 정조에 올린 공식 보고에 판첸라마를 만난 내용이 누락된 것도 모두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 사절의 이러한 반응과 대조적으로 열하의 피서산장은 ‘수십만 대군의 힘과 맞먹는’ 이해와 포용이라는 청의 대외 관계 요체를 파악할 수 있는 곳으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정은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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