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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구중궁궐 여인들의 한… 불심 의지해 인고의 세월 견뎌

입력 : 2016-08-19 21:53:03 수정 : 2016-08-19 21: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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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유교국가 조선 왕실이 불교 신봉한 까닭은 얼마 전 한 방송국의 PD와 작가들이 왕실사찰에 관해 자문을 구할 것이 있다며 연구실로 찾아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PD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다며 질문을 던졌다.

“조선은 유교국가인데 어째서 왕실에서는 500년 내내 불교를 믿었나요? 그게 실제로 가능했던 이유라도 있나요?”

순간 당혹스러웠다. 잠시 고민을 한 끝에 이렇게 답을 했다.

“아들이 죽었어요. 그것도 배다른 형이 여덟 살 난 동생을 펄펄 끓는 방에 가둬 사실상 태워 죽였죠. 이 상황에서 아들을 잃은 엄마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 유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비통함에 치를 떨던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부처님께 아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것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아챘겠지만, 여기서 죽은 아들은 선조의 유일한 적장자 영창대군이고, 동생을 죽인 형은 광해군, 영창의 어머니는 인목대비이다. 사실 이런 대답은 왕실불교를 설명할 수 있는 작은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슬픔이나 고통 때문에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듯, 모든 왕실의 구성원들이 구중궁궐 속의 고독이나 회한을 달래기 위해 불교를 믿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인목대비는 아들 영창대군이 죽은 뒤 경운궁에 유폐돼 불경을 필사하며 인고의 세월의 보냈다. 유일한 낙이 자는 것뿐이라는 인목대비의 칠언시에는 이런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인목대비에게 남은 건 아들의 왕생 발원뿐

조선 왕실이 왜 500년간 끊임없이 불교를 신봉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이다. 하지만 그 은밀하고 금지된 공간 속에서 살아남은 불교신앙의 흔적은 마치 눈 위에 박힌 새의 발자국처럼 얼핏 보면 희미한 듯하면서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비는 마음’이 절절할수록 신앙은 깊어질 수밖에 없고, 깊은 신앙의 흔적들은 역사적 사료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인목대비는 조선왕실을 대표할 만한 불자라고 할 수 있다. 인목대비는 글씨에 조예가 깊었다. 조선의 여러 왕 가운데 최고의 명필로 꼽히는 선조의 영향 때문인지 인목대비도 서예에 능했다. 후궁으로 강등되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격리된 인목대비는 10년간 궁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그 죽음 같았던 인고(忍苦)의 세월을 그녀는 불교경전을 필사하며 견뎌냈다. 인목대비가 남긴 글씨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안성 칠장사에 소장된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보물 1627호)이다.

늙은 소가 힘을 쓴지 이미 여러 해 老牛用力已多年

목이 찢기고 가죽 뚫어져 그저 다디단 잠뿐이로구나 領破皮穿只愛眠

쟁기질과 써레질이 이미 끝나고 봄비 넉넉한데 犁?已休春雨足

주인은 어찌 고달프게 또 채찍질인가 主人何苦又加鞭



유일한 낙은 ‘다디단 잠뿐’이라는 구절에서 인목대비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하다. 인조반정 성공 이후 인목대비는 대비로서의 권한을 되찾았고 비로소 경운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뒤바뀌고 대비로서의 권한을 다시 찾았다 한들, 죽은 아들이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목대비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부처님 전에 엎드려 비명에 간 아들의 명복을 비는 것밖에 없었다. 그녀는 안성 칠장사를 비롯하여 금강산 유점사, 광주 법륜사, 장단 화장사 등을 원당으로 삼고 아들의 위패를 모셨다. 

사진은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보물 1627호)를 소장하고 있는 안성 칠장사.
◆“방방곡곡에 왕비 원당이 아닌 곳 없다”

인목대비에 앞서 선조의 왕비였던 의인왕후도 매우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궁궐 내에서 그녀의 별칭이 ‘살아 있는 관세음보살’이었다. 비록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은 임해군과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보살폈고, 궁중의 모든 이들을 자애롭게 대했다고 한다. 의인왕후는 평생토록 자식 낳기를 발원하며 전국 방방곡곡에 원당을 설치했다. 얼마나 원당을 많이 설치했던지 “전국 사찰마다 왕비의 원당 아닌 곳이 없다”는 비난이 나돌 정도였다. 실제로 금강산 건봉사, 속리산 법주사 등의 사지(寺誌)에는 의인왕후가 보시한 기록들이 등장한다.

의인왕후처럼 아들을 낳기 위한 발원과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위로, 그리고 내세에 극락왕생하기를 발원하는 마음은 ‘불심’이라는 이름으로 왕실의 비빈들에게 폭넓게 퍼져 있었다. 인목대비의 ‘계축일기’에 천하에 둘도 없는 나쁜 여자로 등장하는 김개시(金介屎), 일명 ‘개똥이’도 독실한 불자였다.

개똥이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정업원이라는 왕실사찰에서 맞았다. 정업원은 왕실에서 운영하던 비구니사찰이었고, 왕실여성들이 출가를 하는 곳이기도 했다. 인조반정이 발발할 당시 정업원에서 불공을 드리던 개똥이는 인근 민가에 숨었으나 곧 반정군들에게 잡혀 참수를 당했다.

의인왕후, 인목대비를 모두 제치고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인빈김씨도 불교신자였다. 장서각에 소장된 여러 권의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佛說長壽滅罪護諸瞳子陀羅尼經) 가운데 1600년 간행본은 인빈김씨의 시주로 찍어낸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선조는 의인왕후가 아닌 인빈김씨를 데리고 피난을 갔다. 선조와의 사이에 아들 넷과 딸 다섯을 둘 정도로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이 후궁에게도 더 바랄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 영화로운 세상을 더욱 오래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인빈김씨의 시주 기록 아래에는 오래도록 장수하기를 발원한다〔保體壽命長〕는 기록이 덧붙여져 있다. 

◆불화나 사지 귀퉁이에 남은 불심의 흔적들

의인왕후가 전국 방방곡곡에 원당을 마련해 빌었던 기도와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돼 빌었던 기도, 인빈김씨가 법보시를 하며 발원한 기도, 그리고 개똥이가 마지막 순간에 빌었던 기도 내용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불교는 희망의 끈이었으나 누군가에게는 통곡의 문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부귀영화의 발원처였다. 이렇게 동시대를 살아간 네 여인들에게 불교는 각자 다른 의미의 의지처였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의 첫 번째 왕비였던 신덕왕후부터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까지 대부분의 왕실 비빈들은 모두 불교신자였다는 사실이다. 왕비 자리에 아주 짧게 있었던 몇몇 왕비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찰에 보시를 하거나 불사를 벌인 기록들이 남아 있다. 또한 사찰에 남아 있는 불화의 화기(畵記)나 불복장(佛腹藏)의 시주질에는 상궁 김씨, 나인 이씨 등 이름 없는 왕실여인네의 시주내역도 자주 등장한다. 위로는 대왕대비로부터 아래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나인에 이르기까지 500여 년간 끊임없이 불교를 믿었다는 것은 불교가 조선의 왕실 내에서 종교를 넘어선 하나의 문화로 계승되었음을 보여준다.

1000년간 불보살을 찾아 발원하는 것에 익숙했던 이 땅의 어머니들은 딸에게 그 기도를 전승했고,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그 집안의 불공을 당부했다. 그렇게 이어져온 불교는 조선의 왕실 여인들에게도 가장 친숙한 기도와 신앙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왕실의 폐쇄적 공간과 그곳에서의 은밀한 삶은 불교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울타리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왕실 여성이 지켜낸 안식처이자 해방구

조선왕조 500여년간 끊임없이 이어져온 왕실의 불교신앙은 순정효황후가 마지막 숨을 거두던 낙선재로까지 이어졌다. 평범치 않은 삶을 살아가는 왕실여성들에게는 궁궐이라는 폐쇄적 공간을 넘어,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넘어 시공간적 초월을 할 수 있는 의지처가 필요했다. 유교적 굴레 속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불교는 초월을 꿈꾸고 내세의 행복을 기원할 수 있는 해방구였던 셈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이를 공고화시키며 살아간다. 종교적 세계도 다르지 않다. 불상 앞에서 무엇을 비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정신세계도, 그 사람이 도달하는 곳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왕실 구성원들이 불교를 신앙했던 가장 큰 이유는 불교가 지닌 특유의 포용성 때문일 것이다. 불교는 누군가에게는 아들을 점지해 주는 신통한 종교였으며, 누군가에게는 먼저 떠난 자식의 극락왕생을 발원할 수 있는 의지처였고, 누군가에게는 현세에서의 복락을 내려주는 보물섬과도 같은 대상이었다. 또 다른 이들에게 불교는 이 티끌 같은 세상을 벗어나 참다운 진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뗏목이기도 했다.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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