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난 사람들과 화 날 사람들
전기료 폭탄 더 터지기 전에
가급적 서둘러 대책 세워야 ‘걱정도 팔자’라 해도 할 수 없다. 걱정이 태산이다. 다들 겁내는 전기요금 폭탄이 우리 집에선 어떻게 터질지 몰라서다. 그제 본지에 소개된 광주 서구 윤모씨 사연을 보고는 간이 더 쪼그라들었다. 지난 8일까지 한 달 쓴 전기요금 문자 고지를 받아보니 ‘32만9000원’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전력 사용량은 733kWh로 전달에 비해 50%쯤 는 반면 청구액은 3배 가까이로 폭증했다. 말 그대로 폭탄이다.
광주 서구 윤씨 사연은 얘깃거리가 못 될지도 모른다. 어제 석간엔 평소 8만원 안팎 청구액이 42만원, 52만원대로 각각 치솟았다는 대구 달서구 김모씨, 서울 구로구 정모씨 사연이 실렸다. 5∼6배로 오른 청구액에 불의의 카운터펀치를 맞은 권투선수처럼 처절하게 나가떨어진 사연이 굴러다니는 것이다. 어린 자녀를 키우거나 노인을 부양하는 가정이 가장 취약하다. 주택용 전기에만 적용되는 누진제가 이토록 파괴적이고 엽기적이다.
이승현 논설위원 |
현행 누진제는 국민 일상생활을 짓누르는 괴물이다. 전기를 100kWh 더 쓸 때마다 요금이 너무 가파르게 오른다. 501kWh 이상을 쓰는 최종 6단계에선 kWh당 709.5원의 징벌적 요금을 물게 된다. 1단계의 11.7배다. 산업용 81원, 일반용 105.7원과도 견줄 수 없다. 이래서 광주 서구 윤씨 등이 눈이 튀어나오는 고지서를 받게 된 것이다. 영국 독일 등 단일요금 국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다. 누진배율이 1.1배, 1.4배인 미국, 일본과도 비교불가다.
갈 길은 뻔하다. 최선은 누진제 철폐, 차선은 누진배율 축소다. 그러나 열쇠를 쥔 산업통산자원부는 불가사의에 가깝게 답답하다. 산업부 고위직의 12일 발언이 좋은 예다. “1974년 누진제를 도입할 때 목적이 에너지 절약과 계층 간 형평성이었다”면서 “누진제 개편으로 요금이 인하되면 전력 수요가 늘어날 텐데 이때 안정적으로 전력 공급을 맞추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42년 전, 그러니까 전기다리미 등이 사치품으로 통하던 시절의 잣대로 21세기 일상을 옥죄겠다는 발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더 웃기는 것은 ‘안정적 전력’ 운운하는 대목이다. 지난해 주택용 전기는 13.60%다. 산업용은 56.60%, 일반용(상업용)은 21.40%다. 전력 여유분이 필요하다면 다른 쪽을 챙겨야 하는 것이다. 대체 왜 번지수도 못 찾는 것인가.
부당한 상황을 오래 참으면 없던 병도 생긴다. 원숭이도 못 참는다. 정부 여당은 2003년 9월 ‘네이처’에 실린 원숭이 실험 결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 영장류학자 새라 브로스넌과 프란스 드 발은 4개의 토큰을 주고 오이를 먹으려면 토큰을 대가로 내도록 훈련을 시켰다. 그런 다음 어떤 원숭이에겐 공짜 포도를 줬고 다른 원숭이에겐 오이를 주면서 토큰을 요구했다. 포도는 원숭이가 더 좋아하는 먹이다. 공짜 포도 대신 오이를 받은 원숭이는 심기가 불편할밖에. 원숭이는 10번에 8번꼴로 토큰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불공정 거래를 못 참아 판을 엎은 것이다. 인간은 어떻겠나.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이미 폭탄 고지서를 받아 화가 난 이들이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화가 날 이들이다. ‘누진제의 불공정성’이 화근이다. 한국전력이 상반기에 6조3098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는 분석자료가 어제 공개됐다. 대체 누구 등을 쳐서 그리 큰 돈을 번 것일까. 광주 서구 윤씨 등은 한전과 산업부를 싸잡아 악당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걱정도 팔자’라 해도 할 수 없다. 걱정이 태산이다. 당·정 TF가 왜 다들 화를 내는지 직시하면서 서둘러 행동하는 대신 말잔치나 벌일까 봐서다. 그런다면 국민을 원숭이보다도 낮춰 본다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광주 서구 윤씨 등은 더욱 분통이 터질 것이다. 원숭이가 그랬듯이 판을 엎을지도 모른다.
이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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