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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7〉 ‘임청각 매매증서’ 이야기

입력 : 2016-08-05 20:49:31 수정 : 2016-08-05 20:4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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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대종택 팔아 독립운동 돈줄… 참 명문가 기틀 세워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민간으로부터 고서와 고문서 등의 문화재들을 기증·기탁받아 관리·연구하고 있다. 개인들이 소장한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전문인력과 관리시스템을 갖춘 장서각에서 보다 안전하게 보존·관리하고 한국학의 기초자료로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장서각은 1997년 안동의 무실종택이 대대로 전해 온 전적들을 기탁한 것을 시작으로, 최근 경주 최부잣집으로 알려진 최진립 종가에서 전적 기탁을 의뢰하기까지 20년 동안 꾸준히 기증·기탁사업을 추진해 왔다. 그 결과 현재 장서각 수장고에는 전국 83개 소장처들이 기증·기탁한 5만2천여점의 고서와 고문서, 유물들이 안전하게 보관·관리되고 있다.

기증·기탁 문화재들 중에는 국보 283호로 지정된 ‘통감속편’을 비롯한 18점의 국보·보물들이 존재하며 이외에도 원나라 최후의 법전으로 전 세계 유일본인 ‘지정조격’을 비롯하여 수많은 중요 문화재들이 있다. 가문의 가보로서, 국가의 보물로서,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기증·기탁 문화재들의 가치는 이루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중에서 필자가 특히 각별하게 생각하는 자료가 있는데, 2004년 안동 고성이씨 임청각에서 기탁한 4966점 중 하나인 가옥매매문서다. 1913년 이상희가 이종하에게 기와집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이 문서는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얼핏 보기엔 그리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그렇지 않다.

1913년 이상희가 이종하에게 임청각의 기와집 4채를 매도하면서 작성한 문서이다. 이상희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초명(初名)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400년 고택을 매도하였다.
◆석주 이상룡, 400년 대종택 ‘임청각’을 팔다


여기서 매도하고 있는 가옥은 다름 아닌 ‘임청각(臨淸閣)’의 건물 일부이다. 임청각은 보물 제182호로, 1510년(중종 10)경에 건립된 이래 오늘날까지 500년 동안 안동 고성이씨가의 대종택으로 자리를 지켜온 건물이다. 당시 사가 주택으로는 가장 큰 규모라는 99칸 집으로 칭해졌으며, 고성이씨뿐만 아니라 일대의 중심적인 문화공간이기도 했다.

이 문서에서 임청각의 매도인으로 등장하는 중화민국 회인현의 이상희는 이상룡(1858~1932)의 초명(初名)이다. 고성이씨 임청각파의 17대 종손으로 임청각에서 태어난 임청각의 주인인 그가 1913년 6월, 400년을 지켜온 대종택을 팔아버린 것은 조선의 독립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으로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인물이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에 대한 충격으로 척사위정(斥邪衛正)을 시작하였고, 1895년(고종 32)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계기로 본격적인 의병항쟁에 돌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과 뒤 이은 우리 민족의 의병투쟁이 실패로 돌아간 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민주제도 등 서양의 신학문을 적극 취하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즈음 임청각이 소유한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종들을 해방한 일은 안동의 유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기도 하였다.

1910년 8월 조선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고 몇 달이 지난 1911년 정월, 석주 이상룡은 식솔과 자신을 따르는 50여가구를 거느리고 서간도 망명길에 오른다. 망명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서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건설하여, 경학사라는 항일 자치 결사가 조직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가 설립되었다. 경학사는 부민단을 거쳐 한족회로 개편, 발전하였고 신흥강습소 역시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1920년 서로군정서 창립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1912~13년에 걸친 흉작은 이와 같은 서간도에서의 초기 활동에 운영난을 초래하였다. 1913년 6월, 석주 선생의 아들 준형(1875~1942)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400년 종택인 임청각과 그 대지 및 인근 산판을 방매하기 위해 귀향한 것이다. 아버지의 초명인 ‘이상희’란 이름으로 가옥과 토지를 팔고 다시 서간도로 돌아갔다. 이때 작성된 문서가 바로 ‘임청각매매증서’이다. 이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정확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없지만 조선의 독립을 위한 소중한 자산이 되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임청각의 전경. 그 앞으로 난 중앙선 철로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고성이씨 가문에 대한 일제의 치졸한 탄압의 증거다. 2020년까지 우회철로를 개설하고 임청각 건물을 복원할 계획이 지난해 발표되어 현재 추진 중이다.
안동 임청각홈페이지
◆최고의 독립운동 명문가를 짓누른 철로


석주 선생은 이후로도 서로군정서 독판,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을 역임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매진하였으나, 우리 땅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32년 만주 땅에서 생을 다하게 된다. 석주 선생뿐이 아니었다. 그 아들 준형과 손자 병화(1906~1952)가 역시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애국장과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두 아우 상동(1865~1951)과 봉희(1868~1937) 또한 애족장과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여기에 조카 등을 합치면 임청각 일가에서만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함으로써 항일독립운동사상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청각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동안 임청각은 이른바 ‘후테이센진(ふていせんじん·不逞鮮人·일제가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조선인들을 불온하고 불량한 인물로 지칭하던 용어)’이 다수 출생한 집이라 하여 핍박을 당했다. 1930년대 후반, 일제는 철도를 연결하면서 굳이 노선을 꺾어 임청각 경내를 가로지르도록 했다. 그 결과 1940~41년 개통된 현재의 중앙선은 50여칸의 임청각 행랑채와 부속건물을 철거해 가면서 임청각 앞을 가로막고 건설되었다. 

1925년 상해임시정부 국무령 시절의 석주 이상룡 선생.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명가의 가치


임청각을 가로지른 중앙선 철길은 아직도 임청각 앞을 답답하게 가로막고 놓여 있다. 조국이 해방되어 돌아온 임청각 사람들을 기다린 삶도 그와 같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하여 목숨과 재산을 바친 임청각 사람들이었지만 해방 후에도 형편은 여전히 어려워 입에 풀칠하기도, 학교를 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심지어 석주 선생의 증손자인 이항증 선생의 경우 고아원을 전전하기까지 하였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청각 사람들은 학비와 생계를 위해서는 단 한 평의 토지, 단 한 칸의 가옥도 팔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임청각을 지켜왔다.

이제 임청각 사람들은 500년을 지켜온 임청각과 그 정신을 함께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한때 임청각과 임야 1만2000여평을 국가에 헌납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임청각이 지닌 역사와 문화의 공공적 의미만큼이나 그 관리와 활용도 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임청각의 주인들이 일제시대에 호적 등재를 거부함에 따라 아직까지도 복잡하게 남아 있는 불분명한 소유권의 문제와 유관기관의 곤란함 등의 이유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소중한 종택을 안동시 전통체험장으로 개방하여 누구든 방문하고 묵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임청각이 단지 일개 가문의 종택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소중한 건축문화재이자 독립운동의 역사현장으로서 대한민국의 산 교육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허원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너무나도 늦은 일이긴 하지만 2020년 우회철도를 개설하고 허물어진 건물 전체를 복원할 계획이 지난해 광복절을 즈음하여 수립되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이와 더불어 임청각과 임청각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마음도 한껏 열리길 기대한다.

다른 한 편에서는 송병준과 이완용 등을 비롯한 친일파 후손들의 토지환수소송이 계속하여 제기되고 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불의에 영합하고, 개인과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권력에 복무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지배층이 되고 부와 권력을 누린 이들의 토지였다. 이제는 탐욕과 방종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석주 선생과 임청각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명가로서의 가치 때문은 아닐까.

허원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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