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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의법조타운] 세상을 바꾼 김영란씨 ‘고집’

입력 : 2016-07-29 21:26:18 수정 : 2017-02-03 19:2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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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적 부정부패 뿌리뽑고
청렴한국으로 가는 시험대
이젠 김영란씨 바람대로
부패방지법으로 불렸으면
“답답하고 억울해 고집을 부렸어요. 다수의견이 되진 못했지만 나중에 법이 바뀌어 이젠 피해자 의사와 상관없이 처벌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제 의견이 제도 개선에 반영된 거죠.”

2010년 7월28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8층 대법관 집무실. 한 달 뒤면 6년의 대법관 임기가 끝나는 김영란은 기자와의 인터뷰 도중 기억에 남는 판결 한 건을 끄집어냈다. 성폭행을 당한 10대 소녀가 법정에서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밝혀 화제가 된 사건이었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당시만 해도 청소년 대상 성범죄는 피해자 의사에 반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였다. 미성년자인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설령 그 부모가 반대해도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런데 김영란 혼자 “부모 동의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다가 그만 대법원장과 대법관 13인 전부가 참여하는 표결에 부쳐졌다.

결과는 12대 1. 김영란의 ‘완패’였다. 3명이 논쟁해 2대 1로 승부가 갈려도 진 쪽은 ‘왕따’가 된 기분이 드는 법인데 12대 1이라니, 김영란도 속이 무척 쓰렸을 게다. 하지만 얼마 뒤 국회가 법을 고쳐 청소년 대상 성범죄를 반의사불벌죄에서 아예 뺐다. 김영란의 ‘소수의견’은 이제 당당한 ‘법조문’이 됐다.

오는 9월28일부터 시행에 들어가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은 흔히 ‘김영란법’으로 불린다. 대법관에서 물러난 김영란이 국민권익위원장으로 일하던 2012년 8월 법률 초안 마련과 발표를 주도해 그런 이름이 붙었다.

지난 4년 동안 김영란법은 김영란 본인보다 더 유명해졌다. 공무원이 업자에게 3만원 넘는 식사 대접을 받으면 처벌한다는 말에 반대론자들은 “한정식집마다 2만9990원짜리 ‘김영란정식’ 메뉴를 만들어야겠네”라고 농담했다. 명절 선물이 5만원을 초과하면 안 된다고 하자 “4만9990원짜리 ‘김영란 선물세트’가 새로 탄생할 것”이란 비아냥 섞인 관측도 쏟아졌다. 본디 ‘청렴의 아이콘’이었던 김영란법이 언제부턴가 ‘실현 불가능한 몽상’쯤으로 치부되는 분위기였다.

2015년 3월 김영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뒤 김영란을 향해 온갖 비난이 쇄도했다.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원을 공무원과 똑같이 규제하는 조항은 김영란법 원안에는 없었고 나중에 국회가 추가한 것인데 이마저 김영란에게 ‘덤터기’를 씌워 몰아붙였다. 그래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당장은 힘들어도 미래를 위해 이 길로 가야만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법관 시절 12대 1로 지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은 기백 그대로였다.

마침내 헌법재판소도 ‘김영란법의 취지와 기조가 옳다’고 그의 손을 들어줬다. 헌재의 합헌 결정은 부정부패 척결의 큰 걸음을 뗀 획기적 사건이다. 외국인이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라고 치켜세워도 한국인 스스로 “우린 아직 멀었어”라며 주눅이 드는 건 단언컨대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부정부패 탓이다. 전직 검사장은 검찰 후배들의 묵인 아래 ‘몰래 변론’으로 떼돈을 벌고, 현직 검사장은 기업에서 받은 공짜 주식으로 배를 불리며, 공직후보자 인사검증 책임자는 되레 자신의 비위 혐의로 감찰을 받는 나라가 어찌 선진국일까. 김영란법은 부정부패 일소를 통해 대한민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성장통’이자 ‘고육책’임이 분명하다.

돌아보면 김영란법 이전에 ‘오세훈법’이란 게 있었다. 정치자금 조달·지출을 엄격히 제한해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문화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시는 2014년부터 ‘박원순법’을 시행 중이다. 공무원이 단돈 1000원만 받아도 징계한다니 시청 직원들은 “김영란법보다 더 세다”며 울상이다.

최근 김영란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김영란법으로 불리면 법의 내용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며 “앞으로는 내 이름 대신 ‘부패방지법’이라고 호칭하면 좋겠다”고 밝혔다. 김영란법의 주무부처인 국민권익위는 이 법을 ‘청탁금지법’으로 줄여 부른다. 이제 헌재 결정도 내려졌으니 그의 바람대로 부패방지법 또는 청탁금지법이라고 하면 어떨까. 차기 대권을 노리는 잠룡들이야 본인 이름을 따 지은 법규 명칭이 내심 흐뭇하겠지만 김영란의 목적지는 그들과는 전혀 다를 테니 말이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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