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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그림에 푹 빠져서… ‘놀다 보니 일흔’

입력 : 2016-07-26 21:21:25 수정 : 2016-07-26 21: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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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윤광조·오수환 화업 40년 회고전
‘놀다’ 보니 벌써 일흔이네. 동갑내기 일흔의 화업 도반 도예가 윤광조와 서양화가 오수환이 함께 전시를 연다. 스스로 좋아서 스스로 즐거워서 ‘놀이’에 매달린 세월은 과거에 대한 후회도 없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었다. 미술의 길이 생계수단이 못 된다는 부모, 선배의 고언에도 막무가내로 내달려 온 길이다. 타고나기를 손으로 만지작거리거나 긁적이는 사이에 자기표현의 기쁨이 있다고 여겼던 자기몰입의 삼매(三昧)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시제목도 ‘놀다 보니 벌써 일흔이네-유희삼매’다. 분청사기의 형식적 유사성을 탈피한 윤광조와 서예 등 우리 전통을 서양화로 승화시킨 오수환의 40년 화업을 재조명하는 자리다. 윤 작가는 미국의 필라델피아와 시애틀 등 국내외 유명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오 화백은 프랑스의 대표적 미술재단인 매그재단 초대로 3개월 동안 전시회를 가졌다. 전시를 기획한 가나문화재단 김형국 이사장은 “유명 선배작가들이 일본 유학 등으로 해외조류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 견주어 두 작가는 순전히 한국 토양에서 연찬에 연찬을 거듭해 온 순국산의 작가정신을 가진 작가들”이라며 “우리 토양에서 우리 특유의 소재를 붙잡아 세계적 척도와도 씨름하게 된 작가들”이라고 평했다. 전시는 27일부터 8월 21일까지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27일 오후 2시엔 김 이사장의 전시연계 강연이 있고, 8월13일 오후 2시엔 도예가 윤광조의 작가와의 대화 시간이 마련된다.

윤광조 ‘산동’(山動,The Mountain Moves,2015, 34x12x51cm, 적점토, 화장토, 타래쌓기, 흘림, 귀얄, 뿌리기)
◆윤광조의 ‘예술가로 산다는 것’


우리나라의 현재 문화 환경에서 전업 작가가 작업을 계속하면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마치 알몸으로 가시덤불을 기어 나오는 것과 같다. 우리의 과거 도예문화는 매우 찬란하여 지금까지도 그 가치를 전 세계인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도예는 그 길을 잃고 있다. 다른 분야와 달리, 일반인들의 현대도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개인 작업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경제력과 지속적인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품이란 한 인간의 ‘고뇌하는 순수’와 ‘노동의 땀’이 독자적인 조형언어로 표현되어 여러 사람과의 공감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작품은 깜짝 놀라게 하는 아이디어나 지식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순수와 고독과 열정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미쳐야 한다. 그러나 미치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 머리와 가슴은 구름 위에, 발은 땅을 굳게 딛고 있어야 한다. 이 지극히 상반된, 모순덩어리들을 동시에 지니고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한 사람이 예술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자유스러움, 자연스러움’이다. 새로운 조형인데 낯설지 않은 것, 우연과 필연, 대비와 조화의 교차, 이러한 것들을 통해 자유스러움, 자연스러움을 공감하고자 한다. 이러한 화두로 꾸준히 공부해 나아가면 언젠가 자유와 자연을 그대로 드러낼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수환 ‘변화’(變化, 2007, 235x200cm, Oil on canvas)
◆오수환의 화론(畵論)


화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보는 사람에게 상상력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우주의 무한한 공간에서 노닐 게 하는 것이다. 그림은 최종적인 상태가 아니라 출발점이며 문을 여는 것. 동양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에는 깊숙이 스며 있는 적막이 있다. 동양의 영원성은 바로 이 적막이다. 그에 비하여 서양의 영원성은 존재의 확실성을 위한 것이다.

동양예술은 격을 존중한다. 참다운 것은 기이한 것보다는 평범한 것에, 멀리 있는 것보다 근처에 있으며, 한 개의 돌멩이나 한 가닥의 흐르는 물에 있다고 본다. 평범한 몸짓, 붓의 흔적, 물질의 표정 같은 것이다.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말에 “마음을 경건하게 가다듬고 행동은 간소하고 너그럽게 한다”는 글귀가 있다. 이 조용하고 깊은 경지가 중용(中庸)의 경지, 노(老)의 경지이다. 육체를 자연 속에 되돌리고 맑고 밝은 세계로 가는 것. 모양 없는 모양을 발견하는 경지라고 할까.

나의 그림의 궁극적인 고향은 논리적이 아닌 직관적인 표현, 알 수 없는 쓸모없는 기호적 표현, 의미 없는 기호를 보여주는 데 있다. 의미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운명을 정직하게 따라가는 세계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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