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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5〉 신을 위한 음식의 봉헌 : 혈식·소식·상식

입력 : 2016-07-22 20:31:51 수정 : 2016-07-22 20: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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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통한 조상과의 만남… 장소 따라 제사 메뉴 달라져
‘먹방’이란 단어가 자주 눈에 띈다. 예전에 비해 음식에 대한 프로그램이 다양해져 만드는 것뿐 아니라 직접 먹는 모습을 가지고 서로 경쟁하듯 맛을 전달한다. 그 많은 음식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한다. 매일 가족에게 무엇을 먹일까를, 점심 때 직장 동료들과 어느 식당으로 갈지를 생각한다. 누구와의 만남엔 음식이 끼어있기 마련이다. 스쳐가는 사람에게도 밥 한번 같이 먹자고 약속 아닌 약속을 하면서 헤어진다.

음식을 매개로 한 만남은 죽음 이후에도 이어진다. 제사가 그것이다. 많은 사람이 제사에 대한 추억을 제상의 제물(祭物)을 통해 떠올리듯 제사는 음식과 밀접하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제상의 음식은 더욱더 돋보였다. 음식의 향내는 신을 부르기에 앞서 산 자의 후각을 깨웠으며, 어둠이 깔리고 희미한 촛불 아래서도 빛나는 과실과 떡, 고기 음식은 일상의 먹거리가 아니라 성물(聖物)이었다.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宗廟親祭規制圖說屛風) 중 제6폭 ‘오향친제설찬도’(五享親祭設饌圖)의 부분. 각종 의궤, 등록 등을 통해 조선시대 제사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 날 것을 좋아한 신(神)

신이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당신은 죽어서도 무엇을 먹고 싶을까? 신에게 직접 물어볼 도리가 없으니 답을 알 수 없지만 선현들이 남긴 문헌으로 볼 때 신은 날 것을 좋아한다. 신은 조리한 음식보다 피가 뚝뚝 흐르는 날고기를 즐겨 먹는다. ‘祭’(제)라는 글자가 바로 이러한 날고기를 바치는 모습을 형상한 것이다. 그리하여 제사를 ‘혈식(血食)’이라고 불렀다.

혈식의 모습은 조선시대 종묘 제향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선왕의 신주를 봉안한 종묘에서는 계절의 첫달이 되면 제사를 지냈다. 왕과 왕비의 2위를 모신 제상이라면 58개나 달하는 다양한 음식이 준비된다. 이 중에서 종묘 제향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희생’(犧牲)이다. 제사에 사용되는 소, 양, 돼지 등의 가축은 전생서(典牲署)에서 미리 사육하였다가 제향 전날 종묘에 데려와 검사를 받은 후 도살한다. 그리고 제향 시간이 되면 도살한 소, 양, 돼지의 뼈와 생고기를 상자에 담아 제상에 올린다. 소의 모혈(毛血)과 간료(간과 발기름)을 태워 신을 부르고 소, 양, 돼지의 삶은 고기를 또 다른 상자에 담아서 올렸다. 제1실에서 마지막 제19실까지 차례대로 소, 양, 돼지의 삶은 고기를 바치는 모습을 생각해보라. 제향 때면 종묘에는 희생의 피냄새와 털을 태우는 노린내, 삶은 고기의 냄새가 새벽 공기를 가득 메웠을 것이다. 

왕릉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관이 상을 차리고 있다. 왕릉에서의 제사는 곡분을 주원료로 하고 기름과 꿀을 이용하여 만든 음식인 유밀과가 중요했다.
# 고려말 음식문화 반영된 조선왕릉의 제사

국가 제사에 혈식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지내고 있는 왕릉 제사에 가보면 여기서는 일체 희생을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고기가 들어간 탕이나 찬이 없다. 왕릉에서는 희생 대신 유밀과(油蜜菓)라는 전통 음식이 중요하다. 유밀과는 곡분을 주원료로 하고 기름과 꿀을 이용하여 만든 음식으로 조과류(造果類)의 일종이다. 왕릉의 제상에는 중배끼[中朴桂], 홍산자(紅散子)와 백산자(白散子), 다식(茶食)의 유밀과가 앞쪽에 있고, 그 뒤로 과일, 떡, 탕과 국수 등이 놓인다. 이렇게 희생 대신에 유밀과를 올리는 제사를 종묘의 ‘정제’(正祭)와 구분하여 ‘속제’(俗祭)라고 하였다. 특히 고기류를 일절 올리지 않은 제찬이란 의미에서 소식(素食)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소선은 육식을 배제한 불교 이념 속에서 형성된 고려말 음식문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제물의 차이는 그릇의 차이를 가져온다. 유밀과는 제상에 올릴 때 ‘우리’(?里)에 넣어 높이 쌓아둔다. 우리는 ‘울타리’와 같은 뜻으로 유밀과를 높이 쌓아도 흐트러지거나 쓰러지지 않게 지지해주는 틀이다. 우리 속 유밀과는 그릇에 가려지지 않고 모양과 색깔이 그대로 노출된다. 접시 위 9가지의 떡 역시 색감을 자랑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왕릉 제상에는 꽃을 올렸다. 이와 같이 왕릉의 제상엔 그릇의 위엄이나 엄숙함이 최소화된 반면 화려한 색으로 식감을 돋운다. 생고기와 맛을 내지 않는 질박한 것을 우선시하는 종묘 진설과 확연히 다른 부분이다. 

# 살았을 적 좋아했던 음식으로 만든 제상

고려말 불교의 영향이 선명하게 드러난 왕릉의 소선 형식을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쉽게 받아들였을까? 이러한 의문에 답하듯이 조선시대에는 또 다른 양식의 제상이 있었다. 경복궁 궁궐에 건립된 문소전(文昭殿)의 제물은 왕릉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양식이었다. 곧, 희생을 사용하지는 않고 유밀과를 중심으로 하였지만 여기에 고기가 들어간 탕을 올렸다. 육류의 찬품을 포함시킨 제상의 형식을 혈식(血食)과 소식(素食)에 대비하여 ‘상식’(常食)이라 부를 수 있다.

이는 당시 육선(肉膳)의 찬품을 주장한 근거를 생시(生時)의 상식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문소전은 궁궐 내에 왕실의 가묘(家廟)와 같은 목적으로 세워진 사당이었다. 종묘의 사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사당을 세운 까닭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살았을 때 봉양하던 것처럼 모신다는 명분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이곳에서는 매일 세 끼 음식을 올리고 제상의 음식도 생전에 즐겨 드시던 것으로 준비하였다. 왕릉이 고려의 유산을 간직한 것이라면 문소전은 당시 새로운 유교 이념의 실천과 연관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문소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궁궐에 세워진 선원전(璿源殿)의 다례(茶禮) 음식을 보면 밥과 국, 고기류의 찬품, 과일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상식의 뜻이 궁궐 속 사당을 통해 전해졌다. 

종묘에서의 제사는 희생을 기반으로 날 것의 음식을 제상에 올렸다. 선왕을 왕실의 조상이 아니라 조선의 군왕으로 제향을 받는다는 공적인 의미를 강조해 혈식을 올렸다.
# 조상을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 제사음식

신을 위한 상차림인 종묘의 혈식과 초세간적인 왕릉의 소식, 그리고 일상적인 문소전의 상식은 조선시대 국가 제사의 틀 내에서 고민하였던 제사 형식이었다. 이 모든 것이 같은 대상에게 바친 다른 메뉴의 음식이다. 즉, 공간에 따라 다른 음식을 올린 것이다. 이는 선왕을 대면하는 상황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혈식을 올린 종묘에서는 제사의 공적인 성격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종묘를 포함한 국가 제사는 대부분 희생을 기반으로 한 혈식의 형태를 지닌다. 이것은 국가와 그가 섬기는 신의 초월적 성격을 강조한 것이다. 이때 초월성은 사적(私的)인 성격을 버리고 공적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즉, 왕실가의 조상이 아니라 조선 국가의 군왕으로 제향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반면 궁궐 내에 있었던 문소전은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 부모를 공양하는 효를 실천하기 위한 공간이다. 이러한 공적 공간의 엄정성을 벗어나 가족의 친밀함이 강조된다. 조선전기 국왕이 종묘보다 문소전에 더 자주 가서 선왕을 찾은 까닭 역시 이러한 공간의 특성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시신을 안장한 왕릉은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무덤을 떠나 신주나 초상을 통해 망자를 표상하는 종묘와 문소전은 상례에서 벗어난 길례 공간으로 완결되지만 시신을 안장한 왕릉은 상례(喪禮)의 여운이 남아있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공간의 차이 속에서 유교는 혈식만을 주장하지 않고 토착 문화와 결합하며 여러 상황에 맞는 메뉴를 만들어나갔다.

음식이 귀하던 지난 날 신을 위해 많은 것을 바쳤던 제사 이야기는 부질없는 것일 수 있다. 혈식, 소식, 상식 중 어느 것이 칼로리가 높고 낮은지를 측정하여 그 가치를 추정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제사를 복원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음식은 칼로리의 공급을 넘어서 기억을 전해주는 메신저이다. 무엇보다도 그 맛을 기억하고 공유하는 사람,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의 의식이었다.

‘국조오례의’와 각종 의궤(儀軌) 및 등록(謄錄)에 나오는 제향의 진설을 통해 음식을 맛보고 그들의 심상을 그려본다.

이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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