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우찬제의책읽기세상읽기] 뱀장어처럼 미끄러우니까

관련이슈 우찬제의 冊읽기 세상읽기

입력 : 2016-07-18 21:37:15 수정 : 2016-07-18 21:37:15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닥치고 출세’ 라스티냐크의 후예들
법도 정의도 외면한 성공이 미덕일까
나폴레옹 동상 앞에서 ‘이 사내가 칼로 시작한 것을 나는 펜으로 성취하겠다’고 결의한 사내가 있었다. 이 야심만만한 사내는 그 맹세를 실천했다. 19세기 프랑스 사회사를 소설로 쓰겠다는 의도로 100여 편의 소설을 묶어 ‘인간희극’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바로 프랑스 사실주의의 시조로 불리는 발자크였다. 자본주의 초기의 경제 현실과 인간 행동을 묘파하는 데 장기를 보여 ‘돈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던 발자크의 대표작인 ‘고리오 영감’ 역시 돈과 욕망의 파노라마다.

한편으로는 나폴레옹 전성기 때 큰돈을 벌어 백만장자가 됐던 고리오 영감의 벼락출세와 몰락 그리고 부성애 이야기를 다루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라스티냐크라는 청년의 출세 욕망과 타락의 문제를 예리하게 형상화한다. 라스티냐크는 시골 귀족 출신이지만 매우 가난한 파리의 법대생이다. 그는 한마디로 야망의 상징이다. 신분적·경제적으로 상승을 도모하는 라스티냐크의 곁에 보트랭이라는 반항아가 있다. 그는 라스티냐크의 출세욕을 간파하고 “너와 같이 무일푼의 인간이 빨리 입신출세하려면 손에 때를 묻혀야 한다”든지 “성공이야말로 미덕이다”라든지 하는 조소적 반항의 철학으로 시골 출신 청년을 교육한다. 이런 보트랭의 악마적 거래 방식을 라스티냐크가 바로 수락하진 않지만, 점차로 ‘영웅적 양심’을 상실하고 타락해간다.

확실히 이 소설에서 라스티냐크는 19세기 부르주아 사회에서 입신출세를 꿈꾸는 청년의 전형이다. 그런 까닭에 동시대의 ‘적과 흑’(스탕달)의 쥘리앙 소렐, ‘감정교육’(플로베르)의 프레데리크 모로와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이 두 인물과는 달리 라스티냐크는 대단히 이중적인 면모를 보인다. 선과 악 그 어느 편에도 서 있지 않으면서 적당히 타협해 성취를 거둔다. 발자크의 이후 작품에 다시 등장한 라스티냐크는 출세를 거듭해 부자가 되고 1830년 이후 정계로 진출해 마침내 법무장관이 되고 상원의원이 된다.

이렇게 세속적으로 출세하는 인물인 라스티냐크가 그 성공 비결을 교육받으면서 성장하는 이야기가 문제적이다. “뱀장어처럼 미끄러우니까 쉽게 출세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는 라스티냐크는 현실 상황에 대해 뛰어난 통찰력과 적응력을 보이며 때때로 악마저 받아들인다. 라스티냐크는 상황을 자기 식으로 끌어들여 기막힌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사례다.

봉건시대 끝자락과 자본주의 시대 앞자락의 상황을 라스티냐크는 전형적으로 환기한다. 자본주의 시대의 타락한 행위의 교과서를 미리 펼쳐 보인 셈이다. 라스티냐크 이후 두 세기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와는 다른 자본주의 시절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사회면 뉴스에서 라스티냐크의 후예를 자주 목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까. 법의 정의도 경제민주화도 아랑곳하지 않고 뱀장어처럼 미끄러운 인사들, 여전히 상황 논리를 앞세우고 성공이 미덕이라며 과정의 진실을 무시하고 반성을 멀리하는 경우를 보면서 라스티냐크를 떠올리는 것은 유쾌한 일이 못된다. 그럼에도 발자크의 천재성에는 새삼 경의를 표하게 된다. 오랜 세월 두고두고 상기되는 인물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비평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