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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4〉 착하게 살자, 권선서(勸善書)

입력 : 2016-07-15 20:38:18 수정 : 2016-07-15 20:3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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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법칙 따라 사는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꿈꾸다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주변의 많은 사람을 짓밟고, 악행을 저지르는 남자를 나쁜 남자라고 한다. 당연히 이와 비슷한 삶을 사는 여자는 나쁜 여자일 것이다. 예로부터 한국 문화의 전통은 나쁜 사람에 대한 경계와 미움만큼 좋은 사람에 대한 칭찬과 그리움을 지니고 있었다. 착한 남자와 착한 여자,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착한 사람에 대한 존재론적 그리움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공동체 속에 구현되었다. 착한 사람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생산하고 전승해 역사적으로 공유함으로써 착한 사람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소설은 물론 이제는 영화로도 익숙한 ‘콩쥐 팥쥐 이야기’가 있다. 계모와 계모가 데리고 들어온 딸 팥쥐는 나쁜 사람의 전형이다. 반면 콩쥐는 착한 사람의 모습 그대로다. 전통 소설에서는 계모와 팥쥐에게 갖은 구박과 학대를 받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는 콩쥐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신령의 도움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나쁜 사람인 계모와 팥쥐를 처벌하고 착한 남자인 고을의 원님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산다. 이 이야기 속에는 착한 여자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착한 삶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부활과 행복의 성취과정이 담겨 있다. 우리의 선조는 착한 사람은 지금 당장 괴로운 일을 겪더라도 나중에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 찬 이야기와 신념을 면면히 이어왔다.

조선에서 ‘권선서’는 삶의 지표가 되는 내용들로 채워져 널리 읽혔다. ‘소학’은 마음속의 본질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실현시키는 삶을 권장한 유교에서 중시했던 책 중 하나다.
# 유·불·도, 착한 세상을 꿈꾸다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착하게 산다면, 착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현실은 착하지 못한 사람, 즉 나쁜 사람이 널려 있다. 그래서 전통시대에는 백성들이 착한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수많은 교육과 출판이 이루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권선서(勸善書), 곧 서로 착하게 살자고 충고하며 다짐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이념을 국가의 정치철학으로 천명하였기 때문에 유교의 이념이 백성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백성을 교화하는 다양한 유교의 서적들 중에, 우리가 잘 아는 ‘명심보감’이 있다. 이 책은 어린아이가 글을 배울 때 가장 먼저 읽는 책인데, 첫째 장이 ‘끊임없이 착하게 살자’는 뜻의 ‘계선’(繼善)이다. ‘삼강행실도’나 ‘오륜행실도’는 대표적인 권선서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선업(善業), 즉 착한 행위를 끊임없이 축적하여 결과적으로 극락왕생하는 것이다. 이들은 불교의 핵심 경전인 ‘반야심경’, ‘금강경’ 등을 지니고 소리 내어 외우거나, 실천함으로써 착한 삶과 행복의 씨앗을 심는다. 도교는 하늘의 옥황상제가 지상의 사람들이 실천하는 착한 행위를 잘 살펴서, 사람의 착한 행위 결과에 따라 복을 준다고 믿는다. ‘태상감응편’이나 ‘음즐문’, ‘공과격’ 등이 착하게 살기를 권하는 대표적인 도교의 책이다. 백성들이 착하게 사는 세상은 유교, 불교, 도교가 모두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한글로 쓰고, 그림을 더해 일반 백성들의 이해를 도운 ‘오륜행실도 언해본’. 유교는 백성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고, 백성을 교화하는 다양한 서적들이 보급됐다.
# 언해본 권선서, 착한 백성을 지향하다


조선시대의 정치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착하게 사는 나라를 지향하며 국가에서 지원해 권선서를 출판하고 널리 보급했다. 백성들이 어려운 한문으로 된 책들을 읽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한글로 풀어서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런 책들을 ‘언해’(諺解)라고 한다. 예전에는 한글은 언문(諺文)이라고 불렀으므로 언해는 한글로 풀이한 책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금강경언해’, 유교의 ‘소학언해’, 도교의 ‘태상감응편언해’ 등이 있다.

1800년대 후반기에 이르면 왕실의 지원 아래 엄청나게 많은 도교 계열의 권선서가 한글 풀이를 붙여서 간행됐다는 점은 흥미롭다. 조선 후기는 국가 이념인 성리학의 규범적 기능이 퇴색하고, 국가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서학의 영향으로 서양의 학문과 사상이 유입되어서 중세적 사유인 성리학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기도 했다. 혼란해진 사회질서가 만연되면서 백성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일어난 새로운 사회윤리 또는 규범윤리의 요청이 민중도교 윤리를 유행시킨 것이다. 이런 경향은 대대적인 권선서의 간행과 유포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권선서는 도교, 불교, 유교의 특성을 융합하여 민족 종교의 발생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도교의 계선서인 ‘태상감응편’. 1800년대 후반 성리학의 규범적 기능이 약해지면서 왕실의 지원 아래 도교 계열의 권선서가 크게 유행했다.
# 자연법칙대로 사는 걸 돕는 게 착한 삶


명심보감은 말한다. “착하게 살아라, 하늘이 지켜보고 있다.” 여기서 하늘을 인격적 하늘이라고 믿는 순박한 사람도 있고, 가슴 속의 양심이라고 생각하는 이성적인 사람도 있다. 하늘 또는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움 없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규범적 사유는 동아시아의 보편적 사유 방식이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유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마음속의 본질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실현시키는 삶이다. 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적 욕망의 추구를 버리고 우주자연의 운행법칙인 무위자연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세속의 욕망을 넘어서 주어진 인연의 법칙을 따르는 인생이다.

결국 우리 조상이 생각한 착한 삶이란 억지로 생명의 가치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우주자연의 법칙대로 생명 활동이 이어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부모, 자식의 천륜이 제대로 실현되는 가정, 이웃 간의 조화와 협동이 이루어지는 마을, 생로병사의 법칙이 인위적 욕망에 의해 흩어지지 않는 나라, 남의 것을 약탈하지 않고 베풀며 사는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착한 삶이다.

예컨대 아무런 이유 없이 나뭇가지를 꺾는 것은 나무의 생명이 살아가는 인연의 관계를 인위적으로 파괴하는 일이므로 착한 행위가 아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처럼 고정적 개념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사랑과 자비와 생명의 원리에 따라 만물이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착한 삶이다. 이렇게 서로서로 착하게 살면서 착한 세상을 열어 가는 것이 우리 선조가 꿈꾸던 세상이다.

김백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책임연구원
# 물질문명의 시대, 착한 삶은 어떤 의미인가


그런데 현대 세계는 전통적 세계와는 다르다. AI(인공지능)와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제4차 산업 시대를 맞이하는 인류에게 착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새 시대의 인간에게도 착한 사람이 대우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가. 전통시대에는 삶의 의문이 생길 때 부모나 스승에게 물었다. 가끔 고요한 밤에 별을 보면서 사색함으로써 스스로 해답을 얻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검색한다. 차가운 기계적 세계로 향하는 인류 문명 속에서 기계에 종속되지 않는 따뜻한 가슴의 인간을 지키는 일이 중대한 과제가 됐다. 인간과 기계가 대립하는 삭막한 세상이 아니라, 기계의 편리함을 공유하면서 모든 인간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의 가치를 탐구하고 계발해야 한다.

기계와 공존하며 문명을 이루어가는 인류에게 인간의 생명 가치를 자각하고 공동체를 지속시키기 위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 물질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착한 삶과 악한 삶의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나 마음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면, 선과 악을 가르는 마음이 뜬구름처럼 허망한 것일 수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런저런 생각의 실마리에 따라 욕심과 집착과 미움이 생기는 것이지, 실제로는 마음속에 아무런 욕심과 증오의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인간과 기계를 포함하는 우주자연은 그냥 그대로 변화해 가는 것일 뿐 고정불변의 인위적 가치로 고정시킬 수 없는 것이다. 전통 시대의 우리 조상은 이러한 이치를 체화시켜서, 구체적 삶의 실천을 통하여 착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김백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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