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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3> 영조의 장수 비결

입력 : 2016-07-08 20:04:44 수정 : 2016-07-08 20: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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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세끼 탕약·한 해 1000여편 글짓기… 마지막까지 ‘왕성’
영조 어진. 83세까지 살며 52년을 재위한 영조는 조선시대 최장수 임금이었다.
# 늘 건강을 걱정했던 ‘최장수 임금’ 영조


조선 21대 왕 영조는 83세까지 장수하였고 당쟁의 와중에서도 52년간 재위한 조선 최장수 왕이다. 영조는 건강한 체질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숙종도 건강 체질이 아니었다. 영조는 늘 숙종의 병간호를 7년간 했던 일을 내세우곤 하였다. 형인 경종도 37세에 일찍 죽었으며, 생모인 숙빈 최씨도 49세에 병으로 작고하였으니 영조는 유전적으로도 건강 체질이 아니었던 셈이다. 

어제문업은 영조가 재위 50년의 대표적 업적으로 탕평, 균역, 청계천 준설, 여자노비 공역 면제, 서얼의 청요직 허용, 속대전 편찬 등 6가지를 거론한 글로 만년에 경희궁 집경당에서 지었다.
특히 추위에 약해서 인삼탕이 몸에 잘 받았다고 전한다. 인삼을 주 재료로 하는 ‘이중탕’(理中湯)으로 효험을 본 뒤에 탕약의 이름을 ‘건공탕(建功湯·공을 세운 탕약)’이라고 불렀고, 내의원을 ‘편작’(扁鵲)이라 일컬었다. 편작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전국시대 명의. 우리나라 설화에서도 편작은 명의의 대명사로 화타보다 자주 등장한다.

영조는 만년에 건공탕으로 연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수라보다 자주 건공탕을 먹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고는 했다. 이미 질린 탕약을 하루 세 번 또는 그 이상을 먹어야 하느냐고 따지기도 했으니 어지간히 질리기는 했던 모양이다. 이 처방을 내린 의원이 화타인지, 편작인지, 아니면 양평군 허준인지 말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동의보감은 1613년(광해군 5)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서적을 수합 편집한 책으로 2009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고 국보로도 지정되었다. 장서각에는 한문 목판본과 함께 한글로 언해한 필사본도 소장되어 있다.
# ‘우리 것’, ‘현재’를 중시한 건강관과 국정운영


허준을 화타, 편작과 동급의 명의로 평가한 관점은 눈여겨 볼 일이다. 영조는 화타와 편작 등 중국의 명의와 중국의 의학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허준과 ‘동의보감’에 대해서도 높은 평가를 하였다. 동의보감을 의학서의 여러 가지 장점을 모은 ‘최고의 책(第一書)’이라고 하였으며, 허준의 자손을 서용하여 공로가 직접적으로 후손에 미칠 수 있게 하였다. 내의원에 대해 단순히 칭호만 높인 게 아니라 대우도 확실하게 하였음을 보여준다.

허준, 동의보감을 높인 것에서 ‘다른 나라’, ‘지난 것’을 중시하지 않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와 ‘현재’였다. 우리에게는 화타나 편작보다 허준이 더 중요한 줄 알았고 또 인삼탕에 때로는 계피를, 때로는 부자를 첨가하여 약의 효능을 높일 수 있게 하였다. 물론 질리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지만 원조에 얽매이기보다는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가려 한 것이다.

‘우리’와 ‘현재’를 우선시하는 태도는 국정에도 반영됐다. ‘경국대전’을 현실화한 ‘속대전’이 완성시켰고 ‘탁지정례’, ‘국혼정례’, ‘상방정례’ 등 삼대 정례를 간행했다. 모두 남을 모방하고 예전을 유지하려는 구태를 일소시킨 결단의 산물이었다.

윤음(綸音·조선시대 국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문서) 등을 한글로 언해한 것도 부녀자와 서민들이 한글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현재’의 정황을 중시한 태도에서 비롯됐다. 처음에는 신하들에게 술을 금지시키기 위해 한자로 쓴 ‘계주윤음’(戒酒綸音)을 지었고, 5년 후에는 백성들을 아우르기 위해 한글로 쓴 ‘어제경민음’을 내려 금주의 필요성에 대해 모든 백성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어제경민음’은 영조가 1762년 9월 구슬하여 쓴 한글본 윤음이다. 영조는 1757년 관료들에게 금주의 모범이 될 것을 당부한 ‘계주윤음’을 반포하였으며, 5년 뒤 ‘어제경민음’을 발표하여 금주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 ‘글짓기’, 또 하나의 장수 비결


임금의 자리에 있다고 늙는 걸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영조에게 노년은 극복하기 힘든 인생의 관문이었다. 워낙에 장수를 한 지라 젊은 시절 자신과 국정을 의논했던 신하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만년에는 그들의 손자와 함께 국정을 운영해야 했다. 식욕도 성욕도 떨어지고 잠도 오지 않는 지루한 나날을 견뎌야 했다. 국정 역량이 한참 아래인 어린 신하들이 젊은 패기를 보이기보다는 시세에 따르고 고루한 데 빠져 있는 행태를 바로 잡아야 했다. 고질화된 당파싸움을 막을 수 있는 탕평정책을 펼치는 것도 영조의 몫이었다.

몸은 쇠약하고 정치는 답답하기만 한 상황에서 영조는 글짓기에 집착했다. 정말 미친 듯이 글을 지었다. 산문이건 율문이건 닥치는 대로 지었다. 어떤 해에는 1000여편이 넘는 글을 짓기도 하였다. 하루에도 몇 편씩 글을 지은 셈이다. 힘에 부쳐 직접 쓸 수 없을 때는 글을 불러주고 신하들이 쓰게 하였으며, 이렇게 지은 글이 5000여건이나 된다.

모년봉춘 심축유년(暮年逢春 深祝有年·저물 나이에 또 봄을 맞으니 나이 들었음을 깊이 자축하네.). 영조가 75세 되던 음력 1770년 12월 19일 봄을 맞아 장수를 자축하며 쓴 어필이다.
재미있는 일은 영조가 이 작품 수만큼 첩(帖)으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영조는 아버지 숙종보다 많은 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글짓기를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짓는 글마다 첩으로 만들고 별도의 문집을 만들지 못하게 한 것이다. 효를 실천하는 일환이었던 셈이다.

영조가 대단한 창작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을 정리한 비망기(備忘記)였을 뿐이다. 어쩌면 잊을 수 없는 일들을 토로했다고 하는 말이 맞을 것이다. 60세가 넘은 뒤 재위시절 자신의 업적을 6가지로 정리했다. 자신의 일생을 읊어 글로 만들기도 했다. 자신이 읽었던 ‘소학’과 ‘심경’ 등을 나열하는가 하면, 어떤 책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말했다. 자신이 거처했던 궁궐 건물명을 열거하기도 하였는데 자신이 태어난 전각을 ‘탄생당’으로 불렀다. 창의궁 잠저를 찾아갔을 때 효장세자와 의소세손 등 먼저 간 가족들을 추모하는 심정을 몇 번이나 읊었다. 영조가 지은 다수의 글은 같은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하면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글을 짓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안장리 한국한 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책임연구원
# 아들 죽인 아버지의 깊은 상처…그리고 결단


영조는 66세에 장가를 들었고, 69세에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다. 이런 결단은 의학이 발전해 건강을 자신하는 현대의 노인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혼례는 복잡한 절차와 의례로 인해 당사자를 지치게 한다. 아들을 죽이는 일이 정신적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걸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도세자를 죽이는 방법이 유례없이 잔인해 보일 수 있지만 영조의 입장에서는 불가항력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신하도 사약을 전달하거나 칼을 휘두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뒤 영조는 차마 자신의 침실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의소세손이 공부했던 강학청에 머물면서 애통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문건을 없애고, 이와 관련된 어떤 언급도 하지 못하게 한 처분에서 결코 아물 수 없는 영조의 깊은 상처를 그려볼 수 있다.

영조의 현대의 우리도 감탄할 만큼 오래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본래부터 건강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내의원에 대한 남다른 대우, 자신이 살았던 생애에 대한 회고와 의미부여, 그리고 무엇보다 늙은 나이에도 노인이라는 한계를 생각지 않고 결단하고 실천하던 태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안장리 한국한 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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