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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의월요일에읽는시] 당신이라는 세상

입력 : 2016-07-03 22:50:18 수정 : 2016-07-03 22:5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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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1983~)
술잔에 입도 한번 못 대고 당신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 많은 술을 왜 혼자 마셔야 하는지 몰라 한다 이렇게 많은 술을 마실 때면 나는 자식을 잃은 내 부모를 버리고 형제가 없는 목사의 딸을 버리고 삼치 같은 생선을 잘 발라먹지 못하는 친구를 버린다 버리고 나서 생각한다

나는 빈방으로 끌고 들어가는 여백이 고맙다고 청파에는 골목이 많아 가로등도 많고 가로등이 많아 밤도 많다고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고 북방의 굿에는 옷이 들고 남쪽의 굿에는 노래가 든다고

생각한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버릴 생각만 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한다

술이 깬다 그래도 당신은 날 버리지 못한다 술이 깨고나서 처음 바라본 당신의 얼굴이 온통 내 세상 같다


김영남 시인
박준 시인은 이제 33살이다. 첫 시집을 내서 보았더니 벌써 24쇄다. 그렇고 그런 게 베스트셀러 시집이겠거니 하고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놀란다. 필자보다 높은 수준의 시 독자들이 많다는 것에 대하여. 여하튼 시적 역량과 감수성이 탁월한 시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시 ‘당신이라는 세상’은 날 버린 여자를 못 잊어하며 괴로워하는 내용이다. 청파동 술집에 떠난 여자의 허상을 세워놓고 잊어버리자 하며 술을 마신다.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 풍경들에 위로를 받고자 하지만 끝내 위로가 되지 않는다. 술이 깨고 나니 되레 온통 더 당신 세상이라는 것이다. ‘백석’ 시를 연상시키는 전통 서정이지만 모던한 감각과 정신으로 시인의 그리움을 아주 안쓰럽게 그려냈음을 본다.

김영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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