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왼쪽부터 바오 닌(베트남), 고팔 바라담(싱가포르), 야샤르 케말(터키), 리앙(대만), 찻 껍찟띠(태국). |
“내가 둑에 나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다. 내 아내, 내 아이, 그리고 이름 모를 여인이 늘 강바닥에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시간, 세월은 그렇게 흘렀고, 강물도 역사도 모두 변해간다. 그러나 내 생의 아픔을 수그러들지 않는다.”
혹독한 전쟁을 치렀고 참전까지 했던 바오 닌이 바라보는 베트남의 현재는 과거에서 아픔을 안고 흘러온 강물 위에 떠 있는 듯하다. 또다른 베트남 작가 레 민 쿠에(67)의 ‘골목 풍경’은 보다 직접적으로 베트남의 현재를 은유한다. 냄새 나는 비천한 골목이었던 곳은 살인자의 아들이 독일에 가서 벌어온 돈으로 멋진 2층 집을 짓고, 자본가의 하수인으로 일한 덕에 돈을 모은 또다른 남자 덕에 골목풍경은 그럴듯하게 변한다. 그렇지만 세든 외국인에게 아첨하고 늙은 아비마저 버리려는 삭막한 행태는 베트남 현대사와 중첩된다.
태국 작가 찻 껍찟띠(62)의 ‘발로 하는 마사지’는 통렬한 풍자를 담고 있다. 차관급 고위관료가 부정부패에 연루돼 전전긍긍하자 그의 상관이 은밀하게 ‘발마사지’ 집을 소개해 준다. 그 집에서 발로 하는 얼굴 마사지를 받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승승장구할 수 있다는 귀띔이었다. 과연 발에 자신의 얼굴을 부드럽게 짓밟히고 나오니 기자들 앞에 나서 뻔뻔한 거짓말을 하는 게 수월해졌다. 문제는 일회용 마사지만으로는 평생 철면피가 될 수 없어 비싼 돈을 들여 종신용 철면피를 사야 한다는 점이다.
싱가포르 작가 고팔 바라담(63)은 신경외과 의사 출신인데 획일화시키는 사회분위기에 저항하는 기묘한 스토리를 풀어놓는다. 특별한 약을 개발해 이를 몰래 상수원에 풀어놓음으로써 모든 인간들이 장기(臟器) 공여에 적합해지고 차이가 없어져 자원이 빈약한 나라에서 부를 축적해 나간다는 반어적인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필리핀의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92)의 ‘불 위를 걷다’는 사탕수수밭에서 벌어진 주술적인 이야기를 통해 필리핀의 어제와 오늘을 반추하는 모던한 스타일이다. 이밖에도 야샤르 케말(터키), 마하 스웨타 데비·사다트 하산 만토(인도), 츠쯔젠(중국), 리앙(대만), 남 까오(베트남), 유다 가쓰에(일본) 등의 작품이 수록됐다.
수록 작품을 선별한 평론가 정은경은 “아시아 문학은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잘못 알기 쉽지만 내용이나 형식에서 모던한 작품들도 많다”면서 “외국 작품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야 하는 진입장벽이 있는데 이 책에 수록한 작품들은 장벽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감동을 준다”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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