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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원칼럼] 퇴계 선생, 서애 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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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5-30 18:09:41 수정 : 2016-05-31 02: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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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과 도산서원으로
가는 정치인들
‘청백 정신’은 알고 있나
‘정치 장사’ 행차라면
그곳에는 가지 말라
‘서애청백(西厓淸白)’은 성호 이익이 류성룡에 대해 쓴 글이다. 이렇게 썼다. “서애 류성룡이 조정에서 물러날 때 그를 탄핵하는 말에 ‘세 곳의 전장(田莊)이 미오보다 더 많다’고 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날 때 집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다. 여러 아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살아갈 방도조차 없었다.”

미오는 후한 말 동탁이 금은보화를 모아둔 곳이다. 말을 지어내 탄핵한 사람은 북인이었다.

강호원 논설위원
서애청백에는 문인 정경세가 쓴 시도 있다. “하회 옛집에는 유묵과 시서(詩書)뿐/ 자손은 나물찌꺼기 밥도 때우기 어려워라/ 십 년 정승 자리 어찌 지냈기에/ 성도의 뽕나무 800주도 없다는 말인가.”

성도의 뽕나무 800주는 제갈량이 숨을 거두기 전 촉한의 후주 유선에게 한 말이다. “성도에 뽕나무 800주가 있고, 박전(薄田) 15경도 있으니 자손들 의식에는 걱정이 없다”고 했다. 축재를 하지 않은 제갈량. 그보다 더 청렴한 류성룡을 이르는 시구다. 시골집에는 책과 유묵만 빼곡했다.

안동 하회마을에 있는 류성룡 고택. 그가 살던 집이 아니다. 탄핵으로 삭탈관직당해 고향으로 돌아온 그의 집은 풍산의 작은 초가집이었다. 풍산은 하회마을과 가깝다. 고택이라는 곳은 류성룡이 세상을 뜬 뒤 손자와 제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지은 집이다. 고택 행랑은 8대손인 류상조가 병조판서 때 지었다.

류성룡의 이름에는 으레 ‘대감’ 호칭이 따라붙는다. 왜 붙을까. 임진왜란 때 조선군을 지휘한 도체찰사였기 때문인가. 아니다. ‘청백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있었기에 붙는 호칭이다. 왜 청백이 중요한 걸까. 제 배부터 불리고자 해서야 백성을 생각하고 나라를 걱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부제학, 대사헌, 대제학, 경상도 관찰사,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영의정에 오른 류성룡. 탐욕을 부렸다면 ‘미오의 재부’를 쌓고도 남았을 성싶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초가집 마루에 앉아 징비록을 썼다.

류성룡은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생이다. 이황은 1501년, 김성일은 1538년, 그는 1542년생이다.

이황도 가난했다. 일곱 번이나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안동 예안의 허름한 초가집에서 살았다. 김성일은 이런 글을 남겼다. “선생은 도기를 세숫대야로 삼고, 부들자리 방석을 썼다. 베옷에 짚신을 신고…. 집은 심한 추위나 더위, 비가 들이치면 남들이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아들 준은 처가살이를 해야 했다. 김성일은 이런 기록도 남겼다. “선생이 일찍이 이르기를 벼슬하는 것은 도(道)를 행하기 위한 것이요, 녹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도산서원은 제자들이 돈을 모아 지은 학당이다. 이황의 회갑 때 낙성한 뒤 한 채 한 채를 지어 지금에 이르렀다. ‘대유(大儒)’ 이황의 이름에는 ‘선생’ 호칭이 늘 따라붙는다. 그 호칭에도 청백의 실천궁행이 자리하고 있다. 예안 서쪽 산 너머에 살았던 고려의 충신 통정 강회백과 강종덕. 이들 부자와 자손은 조선에서 벼슬하기를 거부했다. 이황, 류성룡의 청백은 이들의 지조와 또 통한다.

이익은 이런 기풍에 대해 이렇게 썼다. “영남에서는 선비를 관작과 지위로 따지지 않으며 고을의 명망이 없으면 아무리 공경대부라도 그것을 등급으로 여기지 않는다.” 수신(修身)을 하지 못한 사람은 행세를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퇴계 선생과 서애 대감. 그 스승에 그 제자다. 스승은 69세 때 선조 곁을 떠나며 환란과 헐벗은 백성을 걱정하고, 제자는 환란을 온몸으로 막았다.

뜬금없는 정치바람이 안동에 분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하회마을을 찾았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한발 앞서 도산서원에 갔다. 무슨 생각으로 그곳에 갔을까. 청백으로 수신을 하고, 인의(仁義)로 치국을 하고자 한 선유(先儒)의 뜻을 새기기 위해 간 것인가, ‘표 장사’를 하기 위해 간 것인가. 후자에 마음을 더 뒀을 것 같다. 기자를 앞세워 종종걸음으로 그곳에 가고자 했다면 가슴에는 이(利)를 앞세운 마음이 가득하지 않았을까. 요란한 행차에는 수판알을 튀기는 얕은 생각이 어른거린다.

안동으로 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두 선유는 무슨 말을 할까.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잇속이나 앞세우려거든 이곳에는 오지 말라.”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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