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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삶은 수많은 선택의 결과…성숙한 길 놀이판처럼 형상화

입력 : 2016-05-05 17:27:09 수정 : 2016-05-05 17: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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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채색화 전통 잇는 정해윤 작가
서랍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어떤 의미와 내용을 담아야 할지를 성찰하도록 하는 정해윤 작가. 그는 조형미와 의미를 일치시키고 있는 전통회화의 미덕을 유지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삶은 한 번만 주어지기에 공평하다는 말이 있다. 그러기에 연극배우처럼 삶의 무대위에서 충실하게 연기하려 한다. 자연스럽게 주변의 관계망 속에서 자신의 삶의 좌표를 가늠해 보게 된다. 은유가 탄생되는 지점이다. 유사 이래 은유는 인간에게 스스로를 바라보게 해주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불경과 성경 등 종교경전에서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채색화의 전통을 당대 미술로 승화시키고 있는 정해윤(44) 작가의 작업방식도 매한가지다.

“제가 작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 어느 시대나 똑같이 주어지는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사실들을 가지고 삶을 은유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이고 재해석된 형상화 방식을 통해 삶을 캔버스라는 연극무대에 올리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이를테면 그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살아 있는 생명체들에게 주어지는 단 한 번의 시간들을 어떻게 형상화할까, 또 그 삶의 무게를 어떤 매체를 빗대어 말해볼까 고민한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아니한데 삶을 어떻게 저만의 방식으로 형상화시켜야 될까, 하는 문제가 화두였습니다. 삶의 한계적 시간 속에서 서로의 유기적 관계를 어떻게 작품에 투영시켜야 하나 늘 씨름을 한다고 보면 돼요.”

그는 삶을 형상화시키는 과정에서 돌과 실, 파이프 등을 전달매체로 사용하게 된다.

“우리는 한 번 주어진 삶에서 많은 선택을 하고 살아갑니다. 사다리타기 게임처럼 정해진 길은 삶에는 없지요. 다만 각자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과정을 밟는지에 따라 각자의 인생의 목적지가 달라집니다. 작품속의 실타래에서 빠져나온 실들은 인생의 과정에서 수없이 선택해야 할 길들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의 작품 속 메시지는 명확하다. 현재 안 좋은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또 어떤 방법을 취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극복할 또 다른 길이 반드시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인생에는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며 또 항상 첫 번째 선택한 길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처음의 선택한 길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고 해도 그 길을 가는 방법은 또한 정해져 있을 게 아니다. 주변의 상황을 고려해 얼마든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각자의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선택과 대안의 길에서 삶이 성숙해진다는 메시지를 담은 플랜비(Plan B).

“누구나 플랜비(Plan B), 플랜씨(Plan C)를 항상 생각해 둬야 한다고 봐요. 대안의 길은 인간의 삶을 더 성숙하게 만드는 과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요즘 그의 작품에 돌이 등장했다. 각자 시계침을 가진 돌들이 화폭을 부유하고 있다.

“돌이라는 매체는 무겁고 단단해요. 쉽게 생각할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요. 인생 또한 그렇지 않은가요.”

그의 작품속 돌들은 무거우면서도 가볍다. 서로 유기적으로 맞닿아 있다 보니 둥글둥글해졌다. 인생에 단맛 쓴맛을 다 보고 이제는 뾰쪽한 모서리마저 닳고 닳아 웬만한 외부적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자세가 돼있다.

“돌이라는 매체를 통해 단 한 번 주어지는 인생의 시간을 진지하게 성찰해 보고 싶었어요. 성숙한 삶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화폭에 놀이판처럼 형상화한 셈이에요.”

그는 모든 삶들이 결과론적으로 제각각이라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비록 실현된 삶의 이미지들은 다르다 해도 삶은 보편적인 것이지요. 저의 작업은 삶의 큰 줄기를 찾아서 모티브로 삼고 있어요. 시대를 초월하여 저의 상황이기도 하고 타인의 상황이기도 한 공감된 삶의 유기적 관계를 형상화하려고 합니다. 삶의 관계를 형상화하는 놀이가 제작업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지요.”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인간성을 성찰하고 그 관계망을 탐구하고 있다. 동양화 물감에 금분, 은분을 섞어 장지에 겹겹이 먹여 마치 유화와 같은 두꺼운 질감으로 현대적 미감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다. 한 화폭 안에 동양적 색조와 서양의 공간분석적 사고를 아우르고 있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 지난 3월 유럽 최고의 아트페어 중 하나인 테파프(TEFAF)에서도 그의 신작이 매진될 정도다.

“사람들은 날로 모든 것이 뭉개져가고 있다고 상실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럴수록 인간 보편의 문제를 다루는 인문학적 통찰이 요구되지요.”

그는 그동안 서랍이나 박새처럼 개인적인 정서를 환기하는 소재를 통해 개인과 전체의 조화와 인간 사이의 관계망을 이야기했다. 별자리를 상징하는 기호적인 화면을 통해 관계망을 우주로까지 확장하기도 했다.

“실을 주요 소재로 삼아 관계의 문제를 꾸준히 탐구해 왔어요. 실은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관계망이었으며, 별자리를 그려 신화를 재현하거나 새로운 이야기의 실마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실은 그의 신작에선 삶의 여러 갈래로 화면에 등장한다. 기다란 원통형의 기둥 위를 가로지르고 있는 실은 마치 사다리타기 게임의 여러 층처럼 보인다. “무수한 선택이 있고 그만큼의 대안도 존재합니다. 대안의 길은 인간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지요.”

그는 삶의 무게를 드러내기 위해 화폭에 돌을 등장시켰다. 작품 속의 돌은 표면 질감이 탁월하게 표현되어 실제의 것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동시에 부피감은 있으되 질량은 느껴지지 않는 이질적인 감각을 선사한다. 관람자의 시선은 돌 자체에 집중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삶의 무게에 대한 성찰, 명상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마주해야 삶이 견고해질 수 있음을 형상화한 디퍼런스(Difference).

이 같은 주제의식은 디퍼런스(Difference) 연작에서도 볼 수 있다. 구불구불한 두 파이프가 각각의 속성을 명백히 주장하면서도 서로 단단히 얽힌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무디어진 돌과 얽힌 파이프는 관계와 소통의 현현이라 할 수 있어요.”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오래전 김포 자택 작업실에서다. 천경자 화백의 대를 이을 만한 신인 작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수소문 끝에 마주한 적이 있다. 작업에 목숨을 걸듯 치열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미 그때 그는 붓과 캔버스를 중진작가 못지않게 호령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화폭과 씨름하는 자세는 그 어떤 것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서웠다.

“그땐 정말로 그림 자체가 저의 존재이유였던 것 같아요. 그런 자세를 늘 견지하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어요.”

그는 23일까지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전시를 갖는다. 여섯 번째 개인전이다. 전시장 벽면 하나엔 벽화가 그려졌다. 커다란 서랍그림이다. 지난 4일 전시개막을 앞두고 밤샘작업으로 그린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의 서랍이 어떤 것들로 채워질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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