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는 “모두가 내탓”… 광해군에 양위 결심
삼국사기나 고려사와 같은 역사서에도 지진 관련 기록은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지진’이라는 용어가 1800여건 검색돼 전통시대 우리 역사 속에서도 지진으로 많은 고민을 겪었음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전통시대에는 지진이 일어나면 정치 현상으로 연결시키는 경향이 강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1410년(태종 10) 3월15일 기상관측 등을 관장하던 서운관(書雲觀)에서 지진이 있었다고 아뢰자 태종은 “이것은 원통한 옥사(獄事) 때문이니 혹독한 형벌을 가하지 말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에 지진이 가장 심하게 일어난 것은 16세기 초반 중종 시대로서, 1518년(중종 13) 5월18일에 한양을 비롯한 전국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중종실록에 보면 “유시(酉時·오후 6시쯤)에 세 차례 크게 지진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레 소리처럼 커서 인마(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城堞)이 무너지고 떨어져서,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해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밤새도록 노숙하며 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노인들이 모두 옛날에는 없던 일이라 하였다. 팔도가 다 마찬가지였다”고 기술돼 있다.
영의정 정광필은 “지진은 전에도 있었지만 오늘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이것은 신 등이 재직하여 해야 할 일을 모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입니다”고 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조광조도 그의 문집인 정암집에서 “(1513년) 5월16일에 상이 친히 정사를 보는데 지진이 세 번 일어났다. 전각 지붕이 요동을 쳤다”고 이날의 지진을 기록하고 있다. 왕인 중종 역시 자신이 정치를 잘못한 것이 지진의 원인이 됐는지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임진왜란 중인 선조 때인 1594년 한양에 지진이 일어나자 선조는 지진의 원인을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고 왕세자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보이기도 했는데, 지진을 과학적인 기준보다 정치나 도덕적인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지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실록에 지진 기록이 구체적으로 정리된 것은 천문 관측 기관인 서운관(후에 관상감)에서 체계적으로 천문 현상을 관측했기 때문이었다. 실록에는 지진이 발생한 지역과 함께, ‘집이 흔들렸다.’, ‘담장과 성첩이 모두 무너졌다.’, ‘산 위의 바위가 무너졌다’ 등 지진의 강도를 추론할 수 있는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은 지진의 예측이라든가 내진(耐震)이 무엇보다 중시되는 원자력발전소 등 현대에도 적극 참고해 활용해야 할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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