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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을 살릴까

입력 : 2016-04-21 22:29:42 수정 : 2016-04-21 22: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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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연극 연출가 한태숙의 무대는 격조 있다. 쉬운 유머를 섞지도, 지루함을 덜려고 극의 속도를 높이지도 않는다. 잔재주 없이 담담히 나아가는데 단단한 힘으로 관객을 끌어당긴다. 무섭도록 밀도 높게 인간 내면을 파고든다. 그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과 만났다. 자본주의 경제에 희생되는 소시민의 상징 같은 작품이다.

 한태숙의 손을 거친 ‘세일즈맨의 죽음’은 일견 체제보다 개인사를 강조한 듯 보인다. 연극은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세일즈맨의 서글픈 초상을 묵직하게 던져놓는다. 아들에게 헛된 욕망을 투영하는 아버지, 아버지의 욕망 때문에 자신마저 속여온 아들의 비틀린 관계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모든 비극의 뿌리는 ‘한 푼짜리 인생’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다. 탈진하도록 일하다 내쳐지는 노동자, 평생 일해도 주택대출의 덫에서 겨우 벗어나는 사회가 세일즈맨을 죽음으로 내몬다.

 극의 분위기는 스산하고 괴괴하다. 무대 양쪽 8m 높이 아파트는 주인공의 ‘25년 할부주택’을 점점 조여온다. 연출과 무대는 벼랑 끝에 선 세일즈맨을 더욱 낭떠러지로 내몬다. 신파를 노린 장치가 전혀 없음에도 후반부 객석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배우들의 열연이 일품이다. 로먼 역의 손진환은 서 있는 것만으로 고집스럽고 가부장적인 세일즈맨 자체다. 현실이 절망적일수록 그는 무너지지 않으려 철옹성처럼 자신의 몸을 조인다. 몰락을 거부하는 듯 안간힘을 다해 버틴다. 큰아들 역의 이승주는 아버지의 욕망에서 탈출하려 의지를 쥐어짜는 연기를 훌륭히 소화한다. 충격으로 말을 더듬고 목소리가 갈라지는 나약한 반항이 인상적이다. 아내 역의 예수정은 스타킹을 기워신으며 가족의 붕괴를 막으려는 주부로서 극의 중심을 든든히 받친다. 로먼 가족이 대립하는 장면에서는 팽팽한 긴장이 객석을 압도한다. 배우들은 무대 위 그 순간밖에 존재하지 않는 듯 상대 역에 무섭게 몰입한다. 눈을 떼기 힘들다.

 1949년 초연한 이 작품은 무섭도록 현재의 대한민국과 닮았다. 곳곳에 잠복한 대사가 우리 현실을 꼬집는다. 주인공 윌리 로먼은 피곤하다. 말단 세일즈맨인 그는 사장에게 “이 회사에서 삼십 사년을 일했는데, 지금은 보험료도 낼 수 없는 형편이야. 사람 알맹이만 먹고 껍데기는 버릴 건가?”라고 항변하지만 무용지물이다. 그의 머리는 ‘사람이 좋으면 뭐든 잘되고, 인간미와 존경, 우정이 있던 시절’에 머물러 있다. 이런 그에게 친구 찰리는 “가치 있는 건 팔아먹을 수 있는 것들”이라며 세상이 변했음을 일깨운다. 두 아들의 인생도 답답하다. 그의 희망이던 큰 아들은 17살 이후 내리막길이다.

 현실에서 내쳐진 인간은 환상에 매달린다. 로먼은 큰아들에게 맹목적으로 집착한다. ‘그 아이는 근본이 다르고 특별하다’고 착각하며 대단한 인물이 되리라 믿는다. 사회에서 실패할수록 그는 과대망상으로 도피해 자신을 속인다.

 세일즈맨의 비극은 그가 자본주의의 소모품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그는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오르는 데 실패했다. “난 싸구려 인생이 아니야”라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큰아들은 “난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열심히 일해 봤자 쓸모 없으면 버려지는 신세”라고 뼈아프게 외친다. 연극 속 세상은 계층이 고착화되고 ‘흙수저’가 유행어인 우리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씁쓸하다. 공연은 다음달 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열린다. 3만∼6만원. 1544-1555

송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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