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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여동생을 잃은 고통과 그리움… 30년 세월 가뒀다 풀어놓았다”

입력 : 2016-04-15 00:50:28 수정 : 2016-04-15 10: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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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안녕, 테레사’ 펴낸 재미작가 존 차 여동생 피살 현장에는 검은 장갑 한 켤레가 떨어져 있었다. 그냥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양 손가락을 구부리고 발견자를 향해 막 기어오려는 자세였다. 팔이 잘린 살아있는 손 같았다. 오빠는 그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오빠에게 그것은 단순히 흩어진 유품이 아니라 동생이 절체절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설치하고 간 작품으로 다가왔다. 불과 8년 남짓 짧은 작품활동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떠났지만 백남준 이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작품들을 전시하고 세계적인 예술가 반열에 뚜렷하게 등재된 테레사 차(차학경·1951~1982)가 그녀다. 동생을 강간하고 교살한 범인을 법정에 세워 5년에 걸친 재판 끝에 배심원 전원 유죄 평결을 받아낸 오빠 존 차(차학성·71)는 이 기록을 30여 년에 걸친 고투 끝에 실화소설 ‘안녕, 테레사’(문형렬 옮김, 문학세계사)로 최근 펴냈다. 동생이 죽어가면서 남긴 마지막 작품을 세상에 증언하고 그네의 부활을 염원한 결실이다.

“장갑을 발견했을 때 그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나중에 장갑을 가지고 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구요. 마지막 순간에 어찌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사진이라도 찍어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동생의 기록을 정리하면서 매 장면마다 울었어요.”

소설 출간을 계기로 한국에 온 존 차를 그의 영문을 번역한 소설가 문형렬과 함께 광화문에서 만났다. 존 차의 목소리는 느리지만 정감이 있었고 희미하게 자주 웃었다. 오랜 세월 고통으로 단련된 이만이 내보일 수 있는 헛헛한 웃음이었다. 문형렬은 “뾰족하고 날 선 얼굴들이 많은 이즈음 오래전 사라진 한국인의 넉넉한 얼굴을 존에게서 본다”고 옆에서 말했다. 

세계적인 예술가인 여동생 테레사 차의 죽음을 붙들고 30여년 동안 씨름해오다 그 전말을 소설로 펴낸 재미 작가 존 차. 그는 “동생이 죽어가면서 남긴 장갑은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참으로 추상적인 작품이었다”면서 “그 마지막 이미지야말로 이 소설을 끌고 온 힘이었다”고 말했다.
남제현 기자
문학, 미술, 사진, 조각, 그림, 영화, 퍼포먼스에 걸쳐 전방위예술을 구사한 테레사 차는 피살당하기 직전 ‘딕테’라는 책을 써서 지금까지도 미국인은 물론 세계인에게 ‘디아스포라 예술’의 전형으로 각광받고 있는 작가이다. 그네는 1982년 남편을 만나기 위해 뉴욕의 한 빌딩으로 갔다가 그곳 경비원 백인 남자에게 어두운 지하 주차장으로 끌려가 강간당한 뒤 살해당했다. 시신은 네 블록 떨어진 곳에 버려졌다. 경찰이 피살 현장 수색에 실패하자 존 차를 포함한 가족들이 나서서 문제의 검은 장갑을 비롯한 핏자국을 인근 빌딩 지하 주차장에서 찾아냈고 이때부터 지루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범인으로 지목된 자의 정황 증거만 존재하는 상황이었지만 오빠의 끈질긴 노력으로 검사가 세 번씩이나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범인은 결국 유죄 평결을 받았다.

“재판이 끝난 뒤 기억이 생생할 때 기록을 남겨놓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6번이나 써놓은 걸 갈아엎었지요. 증오와 분노가 차츰 가라앉으면서 어느 정도 객관화되고 저 자신의 평화를 위해 그만 잊고 용서해야 한다는 충고도 들었지만 여전히 용서하긴 힘들어요. 동생의 죽음은 제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존 차는 1945년 만주 용정에서 태어나 이듬해 남쪽으로 내려온 뒤 경기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1961년 도미했다. 4·19 국면에서 ‘광기’에 휩싸여 시위 대열을 쫓아다니던 아들의 안위를 염려한 아버지의 ‘추방’이었다. 먼 친척 할머니가 사는 하와이로 홀로 갔다가 이듬해 가족이 모두 건너와 합류한 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다.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뒤 해양시설 엔지니어로 세계를 누비면서 살았다. 테레사 차는 버클리대학에서 미술과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장학금을 받아 파리에서 영상이론도 공부했다. 오빠와 동생은 떨어져 지내면서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존 차 자신도 어린 시절부터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해 작가의 길을 꿈꾸었지만 미국 땅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건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어서 엔지니어로 방향을 잡았다고 했다. 오빠는 동생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생의 반환점을 돌아서야 문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존 차가 1990년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영어로 번역해 당시 문예진흥원에서 주는 한국문학번역대상을 받은 건 어머니의 권유 덕이었다. 남매의 모친 허형순 여사는 용정에서 자라면서 윤동주의 시에 등장하는 ‘순이’의 모델이었을 만큼 아름다운 문학소녀였다. 그 모친의 강력한 자장이 장남은 물론 죽은 여동생에게도 강력하게 미쳤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후 존 차는 다시 도산 안창호의 딸 안수산 여사의 전기 ‘버드나무 그늘 아래’를 출간했고 황장엽 북한 노동당 전 비서 일대기를 집필하기도 했다. 안수산 전기는 소설가 문형렬 번역으로 2003년 국내에도 선보였다. 이보다 앞서 1990년대 중반에는 문씨의 장편 ‘바다로 가는 자전거’를 존 차가 영어로 번역해 코리아타임스 번역상도 수상했다. 한국어와 영어를 서로 번역해주는 사이로 존 차와 20여 년 동안 긴밀한 관계를 이어온 소설가 문형렬은 “존 차의 영어 문장에서는 휘파람 소리가 난다”면서 “아름다운 리듬감이 살아있다”고 평했다.

“동생의 작품들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커다란 울림이 있어요. 문장을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데 우리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무의식이나 정서가 울게 만들어요. 샤만적인 울림이 있어요. 동생의 영어 문장은 워낙 특이하고 탁월해서 어떤 이들은 새로운 영어를 발명했다고 말하기까지 해요. 학경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추방, 망명, 유배의 의미를 담은 에그자일(exile)이었어요.”

‘안녕, 테레사’의 영문 저자 존 차와 한국어로 번역한 소설가 문형렬(오른쪽).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 시절에 이 땅을 떠나 타국에서 디아스포라의 그늘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꼈을 테레사 차. 그네는 떠도는 존재의 숙명을 문자와 소리와 그림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음각해 놓고 떠난 셈이다. 이번 소설을 쓰면서 가장 가슴 저렸던 장면에 대해 묻자 존 차는 서슴없이 어머니의 꿈에서 본 피살 현장을 찾는 대목이었다고 답했다. 어머니는 꿈속에서 710이라는 세 숫자를 선명하게 보았는데 나중에 현장을 발견하고 보니 시멘트 기둥 넘버가 710이었다고 한다. 존 차의 모친을 생전에 만났던 번역자 문형렬은 “그리움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이 소설을 번역하는 내내 절감했다”고 말했다.

“내 안에서 동생은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어요. 몇 년 전 동생을 아끼는 이들이 살아 있으면 환갑일 동생의 생일을 기념한다고 연락을 하던데 내 안에서는 영원히 서른한 살일 뿐이지요. 동생이 마련해준 문학의 길을 계속 갈 겁니다. 어머니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만주 용정의 삶을 구체적으로 파고들면서 한반도와 미국까지 이어지는 디아스포라의 총체적인 면모를 다시 소설로 시작해볼까 싶어요.”

슬픔이 오래 씻겼을 때 나올 법한 낮고 잔잔한 목소리로 오빠는 내내 말을 이었다. 죽은 동생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흘러가는 ‘안녕, 테레사’는 이렇게 끝난다. ‘네가 생의 저쪽으로 간 이유는 이승에서 네가 할 일을 완성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일을 완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 있다. … 때로는 내 꿈에 찾아와 차를 마시고, 너의 황금 숨결을 가진 황금 사슴과 깃털 펜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 말해주려무나.’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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