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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시선으로 바라본 일상… 삶의 본질을 꿰뚫다

입력 : 2016-03-03 20:31:53 수정 : 2016-03-03 20: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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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심보르스카 유고시집 ‘충분하다’ 국내 출간 “무더운 여름날, 개집, 그리고 사슬에 묶인 개 한 마리./ 불과 몇 발자국 건너, 물이 가득 담긴 바가지가 놓여 있다./ 하지만 사슬이 너무 짧아 도저히 닿질 못한다./ 이 그림에 한 가지 항목을 덧붙여보자./ 훨씬 더 길지만,/ 육안으로는 보기 힘든 우리의 사슬,/ 덕분에 우리는 자유롭게 서로를 지나칠 수 있다.”(‘사슬’)

사슬에 묶인 개 한 마리를 보면서 운명의 사슬을 떠올리는 노시인.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족쇄를 개의 사슬에 빗대어 선명하게 드러낸 시편이다. 단지 묶인 줄이 길어서 우리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언설은 얼핏 진부한 듯하지만 누구나 표현하기 쉽지 않은 성찰이다. 이 시를 쓴 이의 말처럼 “길고 치열한 고독의 상태”를 거치지 않으면 거두기 힘든 결실이다. 

1996년 여성 시인으로는 세 번째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그는 유고 노트에 “죽음에 대해 쓰는 것은 쉽지만 삶에 대해 쓰는 것은 훨씬 어렵다”고 적었다.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여성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1923~2012) 유고시집 ‘충분하다’(문학과지성사)가 바르샤바대학에서 공부한 최성은씨 번역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2012년 향년 89세로 작고하기 전 그는 차기 시집 제목을 ‘충분하다’로 정하겠다고 출판사에 반복해서 말했다고 한다. 충분히 시집 편수를 채우지는 못하고 떠났지만 작고한 지 2개월 만에 서둘러 나온 유고시집 ‘충분하다’는 말 그대로 그의 삶을 스스로 평가한 유언이 된 셈이다. 이번에 국내에서 출간된 시집에는 2009년 나온 시집 ‘여기’에 실린 시도 함께 수록했다.

심보르스카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의 본질을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않는 열린 시선으로 비범하게 꿰뚫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28개 언어로 세계 각국에 번역된 그의 시는 국내에도 마니아들이 적지 않다. 폴란드 교과서에 수록된 것은 물론 광화문 교보문고 현판에도 등장한 “두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두번은 없다’)는 심보르스카를 기억하는 대중의 상징적인 시편이다. 80대 후반에 이르러서도 이 같은 시선은 여전히 예리하게 관철되고 있다.

“이 땅 위에서의 삶은 꽤나 저렴해./ 예를 들어 넌 꿈을 꾸는 데 한 푼도 지불하지 않지./ 환상의 경우는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대가를 치르고./ 육신을 소유하는 건 육신의 노화로 갚아나가고 있어.// 그것만으로는 아직도 부족한지/ 너는 표 값도 지불하지 않고, 행성의 회전목마를 탄 채 빙글빙글 돌고 있어,/ 그리고 회전목마와 더불어 은하계의 눈보라에 무임승차를 해”(‘여기’)

“내 기억에게 나는 쓸모없는 청중이다./ 기억은 내게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길 바라지만,/ 나는 잠시도 가만있질 못하고, 헛기침을 하고,/ 듣다가 안 듣다가,/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다가, 다시 밖으로 나간다”(‘기억과 공존하기엔 힘겨운 삶’)

자전하는 지구라는 행성의 회전목마를 타고 심지어 우주의 눈보라 같은 별무리까지 표 값도 지불하지 않고 관람하는 ‘여기’는 얼마나 축복받은 곳인가. 기억 입장에서 보면 끊임없이 망각 사이를 오가는 ‘나’는 얼마나 산만하고 한심한 존재인가. 그렇다고 내가 기억과 결별을 제안할 수도 없다. “그러면 기억은 애처롭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그건 바로 나의 마지막을 뜻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심보르스카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시는 ‘지도’였다. “나는 지도가 좋다, 거짓을 말하니까./ 잔인한 진실과 마주할 기회를 허용치 않으니까./ 관대하고, 너그러우니까./ 그리고 탁자 위에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을 내 눈앞에 펼쳐 보이니까.” 또 다른 세상일지 모를 죽음이란 “조만간 누구에게나 닥치게 될 낮이나 저녁,/ 밤 또는 새벽의 일과라는 걸”(‘누구에게나 언젠가는’) 간파했던 그네는 “죽음에 대해 쓰는 것은 쉽지만 삶에 대해 쓰는 것은 무수히 많은 세부항목 때문에 훨씬 어렵다”고 유고 노트에 적어놓았다.

시 한 편을 봄에 시작해 가을에 끝내기도 할 만큼 시작에 정성을 들였던 심보르스카는 평소 “시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한 군데로 응집할 수 있는, 길고 치열한 고독의 상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심보르스카처럼 이런 유언 남길 사람 몇이나 될까.

“나는 참으로 길고, 행복하고, 흥미로운 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유달리 인복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운명에 감사하며, 내 삶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에 화해를 청합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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