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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신채호·안창호에… ‘새 시대’ 눈 뜨게한 량치차오

입력 : 2016-01-22 19:23:14 수정 : 2016-01-22 23: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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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시장 지음/김영문 옮김/글항아리/5만4000원
량치차오 평전/셰시장 지음/김영문 옮김/글항아리/5만4000원


구한말 조선의 선각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청말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다.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주시경, 안창호, 홍필주, 이상룡, 류인식 등 우리 근대 지식인들은 신민과 입헌을 주창하는 그의 저서를 읽고 새로운 사회 문물에 눈을 떴다. 량은 궁쯔전, 쑨원, 루쉰과 함께 전통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주역이었다. 그럼에도 국민당과 공산당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불행의 삶을 살았다. 그의 진면목은 1989년 6·4 톈안먼 사태를 계기로 재평가된다.

중국의 근대사상 전문가인 베이징 문학평론가 셰시장은 량을 중심으로 근대사상의 연원을 밝혀본다. 량은 중국 근현대 사상가들에게는 일종의 관문이다. 구한말 근현대기 주요 인물들은 모두 그의 저작과 말을 통해 새 시대를 꿈꾸고 희망을 품었다. 당시 청나라가 제국주의 침략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시대로, 지식인들에게는 고통의 시절이었다.

량은 이런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서구사상과 서구제도를 적극 수용하면서, 신민과 입헌의 구국방안을 제시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 쑨원도 급진적인 혁명론을 제시한다. 삼민주의를 제창하면서 서구식 민주정부 건설을 추구했다. 량과 쑨원은 입헌군주제와 민주공화제라는 서로 다른 체제를 놓고 협력과 대결을 벌인 정치적, 사상적 대척점에 섰다. 두 사람 모두 정치제도에서 근대화를 추구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했다. 비슷한 시기 마오쩌둥은 소련식 사회주의제도를 받아들였다.

루쉰은 이와 달랐다. 아Q정전 등에서 보듯이 중국 국민성을 비판하면서, 인간을 억압하고 노예화하는 모든 제도적 억압에 반대하고 ‘참인간 세우기’에 주력한다. 그러나 중국의 병약함을 비판한 루쉰이나 마오의 ‘신중국론’에서도 량치차오의 영향력이 짙게 깔려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근대 작가 후스(胡適)와 쉬즈모(徐志摩)는 량치차오의 계승자였다.

량은 매우 보기 드물게 지행합일의 인물이었다. 온화하고 겸손한 인물이었다. 중국 근대사상의 새로운 기풍을 열고도 스승의 자리에 군림하지 않은 인물은 량과 차이위안페이(채원배), 후스 정도였다.

이런 까닭에 군벌 위안스카이하고도 교류할 수 있었다. 캉유웨이는 량보다 사상적, 이념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전제적이고 고집스러우며 독단적이었다.

중국에서 량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인물도 없다. 대만과 중국 모두 량을 긍정 평가하지 않았다. 공산당 역시 량을 중국의 개혁을 지체시킨 인물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량은 명목상의 군주제인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량은 1980년대부터 재평된다. 량의 사상은 공산당의 일당 독재에 대한 회의와 명실상부한 입헌민주국가를 수립하자는 지식인 사회 흐름으로 이어졌다. 이는 1989년 6·4 톈안먼 민주화운동으로 귀결되었다. 6·4운동의 주역 류샤오보는 2008년 12월 10일 공산당의 일당체제에 반대하고 민주주의와 입헌제도 실천을 요구하는 ‘08헌장’을 발표했다. 100년 전인 1908년 청이 량 등 개혁가들의 요구로 ‘흠정헌법대강’을 발표한 해다. 량이 100여년 전 주창한 신민과 입헌이라는 점진적 개혁의 꿈이 6·4운동 때 새롭게 조명된 것은 이 때문이다.

량은 1910년 조선이 국권을 빼앗긴 사건에 대해 애석해했지만,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이는 중국 근대 지식인의 한계였다.

정승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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