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흙수저… 미래의 공포 반영 언어는 시대의 거울이다. 즐겨 쓰이는 말과 새롭게 만든 말을 통해 시대의 특성을 읽어낼 수 있다. 18세기의 조선은 당쟁과 탕평이 즐겨 쓰였다. 영정조 시대는 당파로 갈려서 대립하는 정국을 우려해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당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1960~70년대는 민생고가 입에 즐겨 오르내렸다. 먹고사는 일차적인 문제가 풀리지 않은 상황이라 그 말을 즐겨 사용했던 것이다.
요즘 흙수저와 금수저를 비롯해 숱한 신조어가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신조어를 통해 우리 사회의 특성을 읽어낼 수 있다. 수저 논의는 개인이 처한 삶의 조건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시각을 넘어 보다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철학 |
이어, 수저 논의는 미래가 전혀 예측 가능하지 않는다는 불확실성을 나타내고 있다. 미래는 과거, 현재와 구별되면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을 가리킨다. 미래에 대한 반응은 시대마다 차이가 있다. 고대인들은 미래를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컴컴한 암흑의 영역으로 보았다. 근대인은 미래를 과거와 현재에 파악한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예측할 수 있는 전망 가능한 영역으로 보았다. 현대인은 미래를 축적된 지식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기획하고자 하는 투자 가능한 영역으로 보았다. 수저 논의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미래의 영역이 조금도 분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현재의 포기와 무기력만이 아니라 미래의 좌절과 공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 삶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어는 찬반의 문제를 넘어서 현상을 진단하고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와 방향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수저 논쟁은 우리 사회가 성실히 노력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근대화의 동력이 차갑게 식어가고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제한돼 있다는 무기력의 공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절망감이 ‘헬조선’으로 표출되고 있다. 기회와 조건이 주어진다면 우리나라에 더 이상 살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원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람이 쓰는 언어와 표현은 정확성과 확실성을 중시하지만 과잉과 왜곡의 측면이 덧붙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근 유행어로 쓰이는 N포세대, 헬조선과 수저 논의는 미래의 희망을 가꾸려는 삶의 동력을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자신의 주위에 흙수저의 사람이 없다고 우리나라에 흙수저의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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