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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근칼럼] 수저 논의와 예측 가능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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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1-10 20:24:45 수정 : 2016-01-10 20:2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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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특성 읽어낼 수 있는 신조어
헬조선·흙수저… 미래의 공포 반영
언어는 시대의 거울이다. 즐겨 쓰이는 말과 새롭게 만든 말을 통해 시대의 특성을 읽어낼 수 있다. 18세기의 조선은 당쟁과 탕평이 즐겨 쓰였다. 영정조 시대는 당파로 갈려서 대립하는 정국을 우려해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당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1960~70년대는 민생고가 입에 즐겨 오르내렸다. 먹고사는 일차적인 문제가 풀리지 않은 상황이라 그 말을 즐겨 사용했던 것이다.

요즘 흙수저와 금수저를 비롯해 숱한 신조어가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신조어를 통해 우리 사회의 특성을 읽어낼 수 있다. 수저 논의는 개인이 처한 삶의 조건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시각을 넘어 보다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철학
먼저, 수저 논의는 연애, 결혼 등을 포기했다는 ‘N포세대’의 신조어를 이어서 등장해 현재의 삶의 조건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춘추시대 묵자(墨子)는 오늘날 ‘N포세대’와 비슷한 삼환(三患)의 고통을 호소한 적이 있다. 즉 추운 자가 옷을 입지 못하고, 일한 자가 쉬지 못하고, 배고픈 자가 먹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맹자는 묵자와 생각을 공유하며 젊은 사람은 일할 곳이 있고 나이 든 사람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왕도(王道)정치의 구상을 밝혔다. 왕도정치는 백성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면서 도덕적 가치에 따른 삶에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포기와 무기력을 넘어서 희망과 도전을 설계할 수 있는 삶의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또한, 수저 논의는 현재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오를 수 있는 사다리가 없다는 점에서 ‘N포세대’보다 한층 더 깊은 절망을 나타내고 있다. 사람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경향이 있다. 처음에 작은 돈을 모으는 적금에 들고, 그걸 타서는 다시 더 큰 금액을 모으는 적금을 드는 것이다. 적금의 액수가 늘어나는 만큼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을 보상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올라갈 수 있는 정점이 이미 정해 있다고 한다면 미래는 현재의 고통을 보상해줄 수 없다. 보상되지 않은 미래는 현재의 도전과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노력을 통해 더 나은 조건을 나아갈 수 있는 상승의 사다리를 든든하게 세울 필요가 있다.

이어, 수저 논의는 미래가 전혀 예측 가능하지 않는다는 불확실성을 나타내고 있다. 미래는 과거, 현재와 구별되면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을 가리킨다. 미래에 대한 반응은 시대마다 차이가 있다. 고대인들은 미래를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컴컴한 암흑의 영역으로 보았다. 근대인은 미래를 과거와 현재에 파악한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예측할 수 있는 전망 가능한 영역으로 보았다. 현대인은 미래를 축적된 지식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기획하고자 하는 투자 가능한 영역으로 보았다. 수저 논의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미래의 영역이 조금도 분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현재의 포기와 무기력만이 아니라 미래의 좌절과 공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 삶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어는 찬반의 문제를 넘어서 현상을 진단하고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와 방향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수저 논쟁은 우리 사회가 성실히 노력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근대화의 동력이 차갑게 식어가고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제한돼 있다는 무기력의 공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절망감이 ‘헬조선’으로 표출되고 있다. 기회와 조건이 주어진다면 우리나라에 더 이상 살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원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람이 쓰는 언어와 표현은 정확성과 확실성을 중시하지만 과잉과 왜곡의 측면이 덧붙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근 유행어로 쓰이는 N포세대, 헬조선과 수저 논의는 미래의 희망을 가꾸려는 삶의 동력을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자신의 주위에 흙수저의 사람이 없다고 우리나라에 흙수저의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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