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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 금판에 담긴 백제·日 관계의 진실

입력 : 2015-12-05 03:00:00 수정 : 2015-12-05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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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지음/국학자료원/2만9000원
일본 천황은 백제 무왕의 자손-미륵사 금판의 증언/이동식 지음/국학자료원/2만9000원


660년 무렵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패망할 당시, 일본 왕이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 3만여명의 백제원정군을 파견한 이유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 당시 일본 여왕이던 제명은 3년여에 걸친 백제부흥군 편성을 지휘하기 위해 후쿠오카까지 달려오다 길에서 숨진다. 그의 아들인 중대형 황자는 어머니의 장례도 치르지 않고 일본 함대를 백제로 보냈으나, 일본 함대는 백강 입구에서 궤멸된다. 백제 부흥에 실패한 일본은 한반도로 향한 모든 문을 닫아걸고 왕의 호칭도 천황으로 바꾸면서 독자생존의 길을 걷는다. 당시 일본 왕은 왜 그랬을까. 왜 나라를 건 모험을 감행했을까. 일본인들도 궁금해한다.

고대사 전문가인 저자는 2009년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서탑 지하에서 발견된 한 장의 금판을 통해 이를 풀어본다.

서탑에 사리를 봉안한 사연이 적힌 이 금판에는 백제 무왕의 왕후인 사택왕후가 등장한다. 이 탑은 639년에 세워졌다. 저자는 의자왕이 무왕을 몰아내고 집권한 쿠데타 이후 무왕 어머니의 추방, 일본 팔각릉 등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밝혀낸다. 익산 미륵사 서탑에 사리를 봉안한 사택왕후와 그 아들, 공주 등은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호족 소가(蘇我)가를 몰아내고 왕권을 차지한다. 이후 후손들은 팔각릉이라는 새로운 무덤 형식을 써서 자신들의 장엄함을 나타낸다. 팔각릉은 고구려 환도산성 등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당시 일본에는 없던 양식이다. 이것은 지금의 일본 천황가가 백제 무왕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한·일 역사학 양쪽에 나뉘어 있어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많은 사건들이, 백제 무왕가의 일본 왕권 접수라는 꼬챙이로 걸어보니 역사의 수수께끼가 확연히 풀렸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백제의 팔각문화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일본의 팔각릉이 백제와 이렇게 연결된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백제부흥운동이 완전히 실패했을 때 “이제 조상의 묘소를 어찌 찾아갈수 있으랴”라고 한탄한 기록의 의미도 밝혀낸다. 지금 팔각릉은 자취를 감추고 대신 천황가를 떠받치는 집안인 후지와라(藤原)계가 팔각탑이나 팔각전을 만들어 조상을 기리고 있다. 저자 이동식은 KBS에서 문화와 역사방면 전문기자로 활약한 언론인이다.

정승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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