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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조선시대 국장과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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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12-01 22:11:26 수정 : 2015-12-02 16: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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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2일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자 민주화의 거목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88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 제3장군 묘역 능선으로, 26일 국가장(國家葬)이 엄수됐다.

조선시대에도 왕이 승하하면 국장이 행해졌다. 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 세자와 세자빈의 장례는 예장(禮葬), 황제의 장례는 어장(御葬)이라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의 사망을 “상(上)이 승하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역대 왕이 가장 많이 사망한 공간은 왕의 침전으로, 창덕궁의 침전인 대조전에서는 성종, 인조, 효종, 철종 등이 승하했다. 왕이 사망한 다음달에는 새 왕이 전 왕의 묘호(廟號·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의 호칭), 능호(陵號·왕릉의 호칭), 시호(諡號)를 정해 올리게 했다. 또한 왕의 평생 행적을 기록한 행장과 묘지문에 담을 내용을 고위 신료들이 분담해 작성하여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발인이 시작되면 왕의 관은 궁궐을 떠나 노제(路祭)를 거쳐 장지, 즉 미리 조성한 왕릉에 도착했다. 도착 후 하관 의식이 끝나면 우제(虞祭·시신 매장 후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고, 가신주(假神主)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왔다. 가신주를 안치하고 나면 왕실의 장례를 주관했던 임시 관청인 국장도감은 그 업무를 종결하고 해산됐다. 가신주는 3년 상이 끝난 후 종묘에 안치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조선시대 왕릉 조성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된 것은 풍수지리와 지역적 근접성이었다. 풍수적으로 명당이면서도 한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에 왕릉이 조성됐다. 후왕들이 자주 선왕의 능을 참배하려면 거리가 가까워야 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왕릉 대부분이 서울과 구리, 고양, 파주 등 경기 북부 지역에 분포된 것도 이러한 이유와 관련이 크다. 한강 이남에 조성된 왕릉이 적은 것은 뱃길을 이용하는 데 따르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동구릉이나 서오릉처럼 왕실의 무덤이 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도 주목되는데, 이것은 선왕의 무덤에 함께 묻히고 싶어 하는 후대 왕의 의지가 반영되고 같은 경역 내에 왕릉을 조성하면 관리가 용이해서였다. 조선의 첫 왕인 태조의 무덤 건원릉은 양주 검암산 자락, 현재의 구리시 일대에 조성됐고, 명당이라 그런지 이후에도 문종(현릉), 선조(목릉), 현종(숭릉), 영조(원릉), 헌종(경릉) 등 여섯 명의 왕이 뒤를 이었다. 동구릉에는 두 명의 왕비 무덤과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무덤을 합해 총 9기의 왕릉이 조성돼 동구릉이라 칭하고 있다.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 6명의 왕(22.2%)의 능이 이곳에 조성됐고, 조선의 왕과 왕비가 가장 많이 묻혀 있다는 점에서 동구릉은 조선시대판 국립현충원과 같은 분위기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왕실의 국장은 최대의 예법을 다해 엄수됐으며, 국장의 과정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의궤(儀軌)를 작성해 보관했다. 이들 기록은 후대의 국장에도 참고해 전례를 계승하도록 만든 것이지만 현재에도 조선왕실 국장의 현장 모습을 생생히 접할 수 있게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국가장 관련 기록도 체계적으로 정리해 후대의 전범으로 삼아 나가야 할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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