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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망각의 역사’ 서양철학에 대한 경고

입력 : 2015-11-20 19:46:20 수정 : 2015-11-20 19:4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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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문명 해체론 외쳤던
니체·데리다의 명맥 잇는
아비탈 로넬의 철학 교양서
아비탈 로넬 지음/강우성 옮김/문학동네/3만원
어리석음-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10/아비탈 로넬 지음/강우성 옮김/문학동네/3만원


사색의 계절에 의미있는 철학 교양서가 나왔다. 진보 성향의 아비탈 로넬(63·사진) 미국 뉴욕대 종신교수가 쓴 ‘어리석음(stupidity)’은 서양철학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다. 서양철학에 대해 ‘너 자신을 알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서구 문명은 철학과 문학을 토대로 사유를 진행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서양 철학과 문학에 대한 경고는 현대 서구 문명에 대한 심판일 수 있다.

로넬 교수는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적 글쓰기로 이름을 알린 철학자이다. 서구문명 해체론을 외쳤던 니체나 데리다의 명맥을 잇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저자는 괴테의 글쓰기를 비판한 ‘받아쓰기 - 신들린 글쓰기(1986)’, 하이데거의 기술론을 논한 ‘전화번호부 - 기술, 정신분열증, 전자 연설(1989)’을 잇달아 발표해 서양적 사유의 비윤리성을 비판했다. 1992년엔 ‘마약 전쟁 - 문학, 중독, 조증’을 출간해 서양문화가 어떻게 창조적 문학을 억압해왔는지 살펴보았다. 

로넬 교수는 1994년에는 ‘유한성의 악보 - 밀레니엄의 종말에 관한 에세이’를 내 미국 문명의 억압성을 비판했고, 2005년 발표한 ‘테스트 충동’에서 서구 문명 비판론을 집대성했다. ‘테스트 충동’은 과학과 기술의 형식을 통해 인간의 잠재성을 박탈해온 서구 문명을 비판한 역작으로 유명하다.

특히 2012년 발표한 ‘패배한 자식들 - 정치학과 권위’를 통해 기독교 및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의 대립적 입장을 풀이하면서 문명 비판의 사유를 지속하고 있다.

인간이 어리석은 존재인 것은 스스로 어리석음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인간 자체가 실존적 무지의 본질은 아니다.

미국 뉴욕대 아비탈 로넬 교수는 ‘어리석음’에서 어리석음을 무지의 표상으로 억압하며 성립한 서양철학 사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도스토옙스키, 카프카, 니체, 데리다, 루소(사진 왼쪽부터) 등은 로넬 교수가 주목한 작가와 철학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로넬 교수는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인간의 처지는 역으로 모든 앎의 기반이 된다고 주장한다. 어리석음에 대한 깨달음이야말로 지혜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라는 얘기다.

로넬 교수는 인간을 ‘어리석음의 초월적 구조’라고 했다. 초월적 구조란 어리석음이 우리 몸에 들어와 우리를 구성하고 있으나 알지 못하는 이질적 존재라는 말이다.

로넬 교수의 사유와 글쓰기는 철학과 문학을 넘나들며 그 경계를 적극 활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서양 철학자들은 선한 바보, 장애인, 창녀, 이방인 등을 무지한 타자(소수자)로 무시해왔으나 거꾸로 문학은 이를 통해 기념비적 작품을 도출해낸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고 한다. 로넬 교수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통해 이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백치는 타자가 타락한 사회에 휩쓸리면서도 선함을 잃지않는 소설의 전형이다.

로넬 교수의 저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철학자뿐만 아니라 서양 문학의 고전 작가들도 두루 포함돼 있다. 철학자의 경우에도 형이상학자들보다 니체와 데리다를 비롯한 ‘해체’ 성향의 인물들을 즐겨 거론한다. 로넬 교수는 카프카와 루소처럼 유독 비판적 사유에 천착한 작가들에 주목했다.

로넬 교수는 ‘유한성의 악보’나 ‘테스트 충동’ 같은 저서를 통해 철학이 그다지 관심 기울이지 않았던 사회·문화 현상들, 예컨대 마약 전화 TV 에이즈 전쟁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어리석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로넬 교수의 해법은 이렇다.

“어리석음의 사유는 어리석음에 ‘관한’ 사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리석음을 사유하는 길은 우리가 지금껏 어리석음을 무엇으로 (잘못) 표상해왔는지 추적하는 작업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어리석음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깨닫는 일이야말로 어리석음의 사유로 가는, 어리석음을 깨닫는 유일한 방도라는 것이다.

수년에 걸쳐 책을 번역한 강우성 서울대 영문과 교수는 “로넬의 해석에 따르면 서양철학은 ‘안다는 주체(철학자 등)’가 무지와 어리석음을 ‘오류(error)’로 통제해온 자기망각의 역사인 셈”이라면서 “로넬이 타깃으로 삼는 대상은 무반성적 지성의 폭력으로 점철된 서양 철학의 사유구조이며, 그 사유구조에 내재된 폭력성”이라고 평가했다. 강 교수는 “따라서 진정한 철학적 앎은 지식 주체의 확실성에 대한 의심이며 ‘타자 앞에서 나는 어리석다’는 지혜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은 난해한 철학적 용어들을 현대어로 풀이하면서 서양문명을 깨우치는 등불과도 같다”고 말했다. 기독교-이슬람 문명 사이에 피의 보복이 벌어지는 최근 상황에 비춰 주목할 만한 책이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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