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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승철 "부활, 첫사랑 같아…결혼은 '퍼펙트' 선택"

입력 : 2015-11-19 10:14:24 수정 : 2015-11-19 10: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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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보이 조지'에서 '라이브의 황제', '보컬 신'으로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애초 1집 타이틀곡 아니었죠"
"재기의 30년…50년 그자리 조용필 형 존경해요"
데뷔 시절 이승철(49)은 '한국의 보이 조지'로 불렸다. 1985년 결성된 밴드인 부활 1집(1986) 당시 가발에 중절모를 쓰고 롱코트를 입은 채 노래하는 모습이 1980년대 영국 인기그룹 컬처클럽의 보이 조지를 연상시켜서다.

꼭 30년이 흘러 그에겐 '라이브의 황제', '보컬 신'(神)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보컬을 흉내 낼 '히든 싱어'들을 찾기 어려운 '원조 음색깡패'이고, 공연 횟수도 센 것만 2천여 회다. LP와 카세트테이프·CD·음원 시대를 관통하며 정규 앨범 12장을 포함 지금껏 22장의 앨범을 냈고 270여 곡을 발표했다. 솔로 앨범 총 판매량은 아무리 못해도 800만장을 넘겼고, 부활 시절까지 포함하면 1천만장 가량 된다.

지금은 턱선이 둥글어졌지만 짙은 쌍꺼풀의 꽃미남 외모도 인기에 한몫했다. 당시 그에게 '입덕'(덕후에 입문)한 여성 팬이라면 '오빠'의 코팅 사진을 수집하고, '오빠'가 나온 하이틴잡지를 붙인 하드보드지 필통 제작은 기본. 반복해 들으면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질까 봐 감상용과 소장용으로 2장씩 구매하는 것도 '새침데기'(팬클럽)의 정석이었다.

'희야~ 날 좀 바라봐~'

그가 눈을 감고 '희야'의 한 소절만 토해내도 팬들은 숨을 죽였다. 밴드의 보컬로 출발한 그는 지금의 스타급 아이돌에 비견되는 인기를 누렸다. 요즘의 10~20대가 그를 소녀시대란 팀명과 동명곡을 부른 가수, 엠넷 '슈퍼스타 K' 심사위원 정도로 안다면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세대에겐 섭섭할 일이다.

"그땐 지금보다 딱 15㎏ 적게 나가던 시절이죠. 하하."

그러나 부활 2집(1987) 이후 1989년 솔로로 나선 그는 대마초 입건과 5년의 방송정지, 첫 결혼 실패 등 사생활로 인한 부침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재기에 성공하며 부활했고 지금도 후배들에게 '리스펙트' 받는 현역이다.

특히 그는 2007년 가정을 꾸리고는 인생 행보에 변화를 보였다. 아프리카 차드에 학교를 짓는 등 꾸준히 나눔을 실천하고, 재소자 합창단을 지휘하고, 탈북 청년들과 독도에서 통일송을 발표하는 등 시야를 넓혔다.

최근 용산구 한남동에서 만난 이승철은 평소 성격처럼 지난 시간의 껄끄러운 얘기까지 막힘없이, 가감 없이 들려줬다.

다음 달부터 내년까지 국내외에서 '더 베스트 라이브' 투어를 여는 그는 인터뷰 다음날 중국 상하이 공연장, 다음 주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현지답사를 한다며 바빠 보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 가정을 꾸리며 전환점이 된 듯하다.

▲ 내게 결혼은 '퍼펙트'한 선택이었다. 음악 하는 사람은 결혼에 두려움이 있다. 창작의 막힘, 영감과 행동의 제약이 생길까 봐. 그런데 난 결혼 후 안정된 환경 속에서 히트곡을 냈고 아내(박현정 씨)의 조언 덕에 나누고 봉사하는 기쁨도 알게 됐다. 올해 딸 원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아이가 커가는 행복도 엄청나다. 가정이 길을 만들어줬다면 종교가 방향을 설정해줬다.

-- 원래 불교신자였는데 지금은 크리스천이다.

▲ 지방 공연 때면 꼭 인근 절을 찾는 불교신자였다. 그런데 꿈에서 마리아를 세 번 만난 후 2년가량 성당에 다녔고 지금은 크리스천이 됐다. 목사님 말씀을 듣고 찬양송을 부르는데 소름이 돋더라. 이후 공연하는 이유와 방향도 달라졌다. 예전엔 가수란 본분만을 위해 무대에 섰다면, 지금은 공연 수익을 아프리카 차드에 10년간 10개 학교를 짓는데 기부하고 있어 또 다른 목적과 책임감이 생겼다. 지금까지 그곳에 5개 학교를 지었다.

-- 뜻을 실천할 수 있는 건 건재함 덕이다. 개성 강한 보컬과 히트곡의 힘인가.

▲ 음색을 포함한 스타성, 팬들이 믿고 듣는 노래, 타고난 운명이 있어야 '롱런'할 수 있다. 노래는 팬들의 믿음이 중요한 것 같다. 그 믿음 속에서 실망시키지 않는 새로운 노래가 나와야 한다. 난 팝, 록,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고 그 다양성이 조화를 이뤘다. 또 운명적으로 좋은 음악을 만났다. 가장 존경하는 선배가 조용필 형인데 노래, 시대적 분위기, 타고난 운명을 봤을 때 최고다. 형처럼 50년 그 자리에 있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2년 전에는 '헬로'와 '바운스'로 아이돌 못지않은 사랑을 받으셨다. 가수로서 형의 타고난 운명은 정말 부럽다.

-- 노래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한 건 언제였나.

▲ 고등학교 2학년 때다. 또래들이 밴드 연습하는 곳에 구경 갔다가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부르면 친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장난삼아 동네 음악다방 노래 콘테스트에 나가 1등을 하곤 했다.

-- 부활의 보컬로 들어간 계기는.

▲ 어느 날 동네 형이던 김태원 형을 록그룹의 메카인 서문악기사에서 만났다. 건반 연주자를 구해달라고 해 당시 내가 하던 밤업소 밴드의 건반을 연결해줬다. 졸지에 우리 밴드가 깨졌고 백수가 된 나는 군포에 있는 부활 연습실에 놀러다녔다. 한번은 보컬을 소개해달라더라. 부활의 전신인 '디엔드' 보컬 김종서 형이 빠진 탓이었다. 그런데 나보다 잘하는 애가 없더라. 하하. 태원이 형이 노래를 시키고는 보컬을 하려면 마이크 시스템을 사오라고 했다. 교사이던 어머니가 1년치 연봉을 털어 400만원 하는 장비를 사주셨다.

-- 어머니(지난해 별세)가 음악 하는 아들의 길을 물심양면 지원해주신 건가.

▲ 물심양면까진 아니고 교육자 집안이었으니 음악 하는 걸 허락한 자체가 굉장한 것이었다. 30년 전이니 400만원은 큰돈이었다. 그때 이후 결혼하기 전까지 어머니가 내 저작권을 다 가져가셨다. 하하.

-- '희야'와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담긴 부활 1집은 크게 히트했지만 '회상 Ⅰ'이 담긴 2집은 성적이 저조했다.

▲ 1집의 체감은 밀리언셀러 급이었지만 2집은 실험적이어서 예술성으로 평가받은 대신 호응이 적었다. 당시는 제대로 된 집계 시스템이 없었으니 정확한 앨범 판매량은 기획사 대표만 안다.

-- 2집 이후 부활에서 나온 이유는.

▲ 부활에서 1년 반 활동하며 돈을 만져본 적이 없다. 매니저가 음반 수익뿐 아니라 보리음료 광고 개런티까지 횡령해 신뢰가 깨졌다. 밴드를 유지하기 힘들었고 나와 태원이 형, 매니저 셋이 모여 헤어지는데 합의했고 부활이란 이름도 쓰지 말기로 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별 공연도 했다. 나중에 두 사람이 부활이란 팀명을 쓰게 해달라고 해 태원이 형이 만든 밴드이니 그러라 했다.

-- 그렇다면 '김태원 씨와 불화다, 이승철이 뜨니 배신했다'는 소문이 억울했겠는데.

▲ 합의 후 각자의 길을 가 부활을 나온 뒤에도 태원이 형과 사이가 좋았다. 내가 부활에서 나와 바로 솔로로 독립한 것도 아니었다. 난 윤상, 손무현 씨와 그룹 걸프렌드를 결성했는데 음반을 내진 않았다. 손무현 씨가 솔로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권유해 1989년 솔로 1집 '안녕이라고 말하지마'가 나왔다.

--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는 대박이 났는데.

▲ 처음 얘기하는데 사실 타이틀곡은 '마지막 나의 모습'이었다. 이 노래로 첫 방송인 MBC '화요일에 만나요'에 나갔는데 반응이 없었다. 결국, 한달만에 타이틀곡을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로 바꾼 게 성공이었다. 그해 1집과 1.5집을 잇달아 내고 이듬해인 1990년 대마초로 걸렸다. 당시 매니저가 구치소로 면회를 와 계약이 2년 남았는데 여기서 끝내자고 하더라. 유리창 너머로 그렇게 말하는 게 야속했지만 그러자고 했다. 



-- 그래서 3집 '방황'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음반을 직접 제작한 건가.

▲ 1992년 3집부터 매니저 없이 내가 제작하고 홍보했다. 매니저들이 그런 나를 욕해 1990년대에는 적도 많았다. 직접 LP를 들고 오전 7시부터 밤 11시까지 MBC 7층 라디오국에 앉아있었다. 그때는 대마초로 5년간 방송 정지여서 LP를 줘도 PD들이 틀어주지 못했다.

-- 그럼에도 3집은 터졌다. 1995년까지 방송 정지 5년은 시련이었겠다.

▲ '방황'이 MBC 음악 방송 상반기 결산에서 재미있게도 댄스 부문 1위를 했다. 그때 3개월가량 방송 정지가 풀려 상을 타러 턱시도를 들고 가는데 MBC 고위 관계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모 가수가 너처럼 입건돼 선배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더 쉬라'고 했다. 2년 만에 풀렸다가 다시 3년을 보냈다.

-- 5년을 어떻게 보냈나.

▲ 공연만 했다. 인기는 하락하지 않아 대형 공연, 전국투어 티켓도 '솔드아웃' 됐다. 라이브 앨범을 내도 잘 됐다. 그래도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다르지 않나. 유치한 얘기로 들릴 수 있지만 결국 팬이 있어 버텼다.

-- 5집의 '오늘도 난'(1996), 6집의 '오직 너뿐인 나를'(1999)까지 솔로로 승승장구했는데 2002년 15년 만에 부활로 재결합해 '네버엔딩 스토리'를 낸 이유는 뭔가.

▲ 내가 녹음실을 만들어 첫 작품을 뭘로 할까 고민하다가 태원이 형에게 부활 앨범을 제작해보겠다고 했다. 사실 '네버엔딩 스토리'도 3개월간 뜨지 않았는데 이휘재·유재석의 '이유있는 밤'에 연습 장면이 나간 뒤 터졌다. 당시 앨범 한 장만 같이 하기로 했는데 너무 잘돼 1년간 투어도 했다. 이후 연장도 고려했지만 음반유통사 문제가 생겨 그만두기로 했다. 부활은 내게 첫사랑 같은 느낌이다.

-- 솔로로 돌아와 낸 7집 '긴하루'(2004)가 다행히 성공적이었는데.

▲ 데뷔 후 처음 1등 한 게 '긴하루'였다. KBS '가요 톱10'에서 '희야'와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로 각각 1위 하려던 때 잡혀가 녹화에 못 갔다. 그때 광고를 14개 정도 찍었는데 위약금만 20억원 정도 물어준 것 같다. 하하. 지금은 상업 광고는 안 찍는다.

-- 2000년대 중반 이후 디지털 음원 시대로 변하며 LP와 CD 시절의 그리움도 있을 텐데.

▲ 장단점이 있다. 그땐 사람들이 낭만을 갖고 음악을 듣던 시대다. 지금은 '딜리트'(Delete) 하면 사라지는 음원 시대로 음악이 인스턴트처럼 된 게 아쉽다. 하지만 디지털화로 수익은 줄어도 정산은 더 투명해졌다. 예전에는 200만장 나가도 기획사 사장이 45만장 나갔다고 할 수 있었고, 음반사가 뒤에서 '짝퉁' 테이프를 찍어 유통하기도 했다.

-- 꾸준히 정규 앨범을 내는 건 책임감인가.

▲ 난 녹음실이 있어 제작 여건이 되니 그랬는데 요즘 갈등을 하고 있다. 올해 12집을 내기 전에도 3곡씩 계절별로 신곡을 내는 게 효과적일지 갈등했다. 그런데 '나마저도?'란 생각이 든다. 음악 기자들이 나를 예우해주며 이렇게 남아있어 주길 바라는 마음도 느껴진다.

-- 이승철이란 브랜드에 자부심이 있을텐데.

▲ 자부심은 있다. 그런데 격세지감은 국내에서 히트한 것이 다가 아니란 것이다. 하하. 싸이가 부러운 건 10년, 20년이 지나도 건재할 브랜드 파워가 생긴 것이다.

-- 지난 30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과 인생 한곡은.

▲ 여의도 63빌딩에서의 부활 첫 콘서트,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로 데뷔했을 때,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25주년 공연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솔로 데뷔 무대가 맨땅의 헤딩이었으니 가장 긴장됐다. 노래는 '희야',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등 한 곡을 꼽기 어렵다. 인생에 굴곡이 많아 재기곡이 많다. 범국민적으로 불린 건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같다.

-- 내달부터 26곡을 엄선한 '더 베스트 라이브' 투어가 시작된다.

▲ 다음 달 일산, 부산, 광주, 서울, 인천 등지를 돌아 내년 캐나다, 호주 등 해외로도 이어진다. 내년 5월에는 30주년 공연을 펼칠 계획이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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