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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서 버림받은 참전용사의 통렬한 복수극

입력 : 2015-11-12 22:31:27 수정 : 2015-11-13 03: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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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피에르 르메트르 장편 ‘오르부아르’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르메트르(64)의 장편 ‘오르부아르’(임호경 옮김·열린책들)는 전쟁을 소재로 지은 한 편의 소극이다. 웃을 수도 마냥 즐길 수도 없는, 전쟁의 끔찍한 참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서 그 실체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게 만드는, 무거운 주제와 소재이지만 흥미가 반감되지도 않는, 추리와 본격문학이 적당히 섞인 기묘한 혼종소설이다. 대중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메시지가 제법 무겁고, 이른바 본격문학이라고 하기에는 문체가 가볍다. 이런 소설이 2013년 프랑스 문단 최고의 상인 공쿠르상을 받자 향후 프랑스문학이 달라지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통상 40만부가량 팔리던 수상작들의 전례를 깨고 이 소설은 100만부 넘게 팔려나갔다고 한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55세에 늦깎이로 데뷔해 추리소설 작가로 이름을 날리다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공쿠르상까지 수상한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르메테르. 그는 “인물의 생각을 직접 전달하는 게 아니라 행동을 통해 독자들이 그의 생각을 느끼게 만드는 스타일”이라면서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머릿속 장면을 묘사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열린책들 제공
도네 프라델이라는 몰락 귀족 출신 미남 중위가 있다. 이 사내는 1차대전 휴전 소문이 들리자 초조해한다. 항상 화가 나 있는 듯하고 페이스를 조절할 줄 모르는 조급한 이 사내는 전쟁에서 더 이상 공을 세울 기회가 사라지는 걸 한탄하다 범죄를 획책한다. 젊은 병사와 늙은 병사 하나씩을 차출해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113고지 정찰을 보낸 후 뒤에서 총을 쏘아 죽이고 독일군 소행으로 위장해 귀가할 꿈에 젖어 싸울 의지를 상실한 병사들을 살육의 판으로 내몬다. 등에 총알 구멍이 난 시체를 발견한 알베르 마야르, 이 가여운 병사는 프라델에게 떠밀려 포탄 구덩이에 생매장된다. 또다른 불운한 병사 에두아르 페리쿠르는 극적으로 알베르를 구하지만 정작 본인은 날아온 포탄 파편에 아래턱 전체를 날려버렸다.

알베르와 에두아르, 프라델 이 세 사람이 바야흐로 소설의 축이다. 프라델은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제대를 하자마자 전후 이권사업에 뛰어든다. 전시에 아무렇게나 파묻은 병사들의 시체를 발굴해 대형 공동묘지로 옮겨 매장하는 사업계약을 뇌물과 인맥을 활용해 정부로부터 수의계약으로 따낸 후 경비를 착복하기 위해 해괴한 행위를 벌인다. 허물어져 가는 자신의 성을 개축하려면, 정부에서 시체 한 구당 얼마씩을 지불하기 때문에 2000구를 찾아내면 성의 마구간을, 3000구를 찾아내면 전체를 개축할 수 있고, 4000구를 찾아내면 비둘기탑까지 고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내달린다. 그리하여 관값도 흥정을 벌이다 130cm짜리 관을 동원해 죽은 병사들을 욱여 넣었다.

“그들을 관 속에 집어넣기 위해 목을 꺾고, 다리를 톱으로 절단하고, 발목을 부러뜨려야 했다. 간단히 말해서, 병사들의 시신을 마치 잘라내고 토막 낼 수 있는 상품처럼 취급한 것이다.”

폭탄 파편이 코 아래쪽을 날려버린 에두아르. 코 아래로는 휑하니 아무것도 없고 목구멍 입천장, 위쪽 치아가 환히 드러나 있고, 아래쪽에는 진홍색 살덩이들의 마그마 같은 것이 보이는데,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은 아마도 성대인 듯하고, 혀는 더 이상 없으며, 식도는 축축한 빨간 구멍을 이루고 있는 가여운 병사. 그에게는 삶 자체가 가혹한 형벌이었다. 생명의 은인인 그를 부부처럼 살뜰히 보살피는 ‘울보’ 알베르. 에두아르의 강력한 제안으로 그들은 전후 사악한 무리의 위선에 통렬한 하이킥을 날리기 위해 전사자 기념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거액을 모금하는 사기행각을 벌인다. 결과는? 읽어보시라.

프라델의 착복 행위는 실화가 기반이고, 기념비 사기는 작가의 허구이지만 둘이 뒤바뀌어도 그 시대 혹은 인간이라는 종의 한 속성이 뒤바뀔 수는 없다고 작가는 후기에 써놓았다. 55세에 늦깎이로 데뷔해 추리소설을 쓰다가 공쿠르상까지 받은 르메트르는 지난 10일 서울 프랑스문화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한 부조리하고 음험한 행위는 모든 시대, 모든 국가에서 일어난다”면서 “나는 대중소설 작가라는 타이틀을 피하지 않지만 독자들이 열정적으로 읽고 이 책을 덮고 난 뒤 깊이 생각할 요소가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1차세계대전이야말로 유럽을 재편성한 엄청난 상흔”이라며 “20세 초반의 젊은이들이 4000만명 가까이 희생된 전쟁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쓴 바 있다. 표제로 쓴 ‘오르부아르’는 헤어질 때 하는 인사로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의미이다.

“지구는 늘 대재앙이나 역병으로 황폐화되기 일쑤고, 전쟁은 이 둘의 조합에 불과하다. 그를 탄환처럼 꿰뚫은 것은 죽은 이들의 나이였다. 대재앙은 만인을 죽이고, 역병은 아이들과 노인들을 죽이지만, 젊은이들을 그렇게 대량으로 학살하는 것은 오직 전쟁뿐인 것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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