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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배자는 왕도 신하도 아닌 사대부였다”

입력 : 2015-11-05 20:43:17 수정 : 2015-11-05 20: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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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의 사대부’ 시리즈 6권 출간
이방원과 정도전은 한때 동지였다. 쇠락한 왕조 고려를 함께 무너뜨렸고 조선을 창업한 일등공신이었다.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적이 됐다. 둘은 통치 시스템을 두고 결정적인 차이를 보였다.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고, 정도전은 신하의 총의를 모은 재상 중심의 통치를 지향했다. 그러나 이방원의 승리가 왕권 중심주의의 확립은 아니었다. 왕권과 신권의 갈등과 부침은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조선왕조 500년 내내 이어졌다. 조선의 지배자는 왕이었을까, 신하였을까.

둘 다 정답은 아니다. 사대부라고 대답하는 게 실상에 가깝다. 왕도 사대부의 일원으로 생각했고, 조정에 오르지 못한 선비는 사대부란 이름 아래 통치자로 군림했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다. 따라서 사대부를 모르고는 조선도 이해할 수 없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사대부의 실체를 보여주는 ‘조선의 사대부’ 시리즈 6권을 출간했다. ‘혼인’ ‘족보’ ‘한글 편지’ ‘초상화’ ‘문무’ ‘윤리’를 주제어로 사대부를 다양하게 분석했다.

◆초상화에 표현한 자의식

5살에 경서에 통달했고, 세종조차 감탄했다는 조선의 천재 김시습.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자 환멸을 느껴 책을 불사른 뒤 승려가 되어 세상을 방랑하며 살았다. 처음으로 자화상을 그린 문인화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문집에 판화도로 실려 있는 그림에 글을 남겼다. 

 
사대부들이 남긴 초상화에는 직접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고, 스스로 다짐하는 내용을 담은 글들이 남아 있다. 김시습(위)은 ‘바보’로 자칭하며 겸양의 미덕을 보인 반면, 강세황(아래)은 “가슴에 책 수천 권을 품었다”며 강한 자의식을 드러냈다.
“…너의 모습은 눈이 푹 들어가고, 너의 말은 바보 같구나/ 너는 산골에 두어야 마땅하리라.” 스스로를 ‘爾‘(이) 즉 ‘너’라고 부르며 자신을 낮추고 있다. 주의할 것은 ‘산골’로 해석된 원문의 ‘丘壑‘(구학)이란 단어다. “순수하고 고상한 인격의 공간, 더럽혀질 수 없는 철저한 인격”을 의미한다.

강세황은 18세기 조선 예림(藝林)의 총수였다. 탁월한 화가였던 그는 자화상을 남겼다. 평상복인 도포를 입고 관복의 오사모를 쓴 모습인데 정식 드레스코드에서 비껴간 모습이다. “…가슴에는 이유의 수천 권 책이요 붓으로는 오악을 흔들었지만/ 사람들이 어찌 알리 내 스스로 즐길 뿐…” 오만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자부심이다. 

곽재우의 유품
조선 선비들이 초상화에 직접 남긴 ‘자찬’(自讚)의 사례다. 자찬을 통해 그들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인생을 돌아봤다. ‘화상찬으로 읽는 사대부의 초상화’를 쓴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고연희 연구교수는 자찬이 시기에 따라 변화를 보였다고 분석했다. 전기에는 외모와 실력을 낮추면서 자부심을 은근히 드러냈다. 김시습의 자찬에서 ‘바보’, ‘산골’ 등의 단어를 통해 읽을 수 있는 태도다. 반면 후기에는 강세황의 사례처럼 자기과시가 강해지는 경향이 뚜렷하다. 김 교수는 “자신을 경계하고 혹은 기대하느라 자학과 비판의 어조를 보이기도 하지만 자아가 은근히 강하게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문무 겸장의 사대부

‘문치’는 조선을 경영하는 중요한 원리였다. 조선의 엘리트들은 기본적으로 학자였다. 그래서 “조선은 문약(文弱)했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선비들이 마냥 백면서생은 아니었다. 그들의 사상에는 상무정신이 깃들어 있었고, 국방정책을 토론하기도 했다. 칼을 차고 전장을 누빈 이들도 많았다. 

조식의 사상에는 상무정신이 강하게 남아 있다. 조식의 제자인 곽재우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며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사진은 조식의 유적.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유림을 이끈 대학자다.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의 학통을 계승해 도학을 발전시키고 많은 제자를 키웠다. 의(義)에 기반을 둔 실천을 중시했던 조식의 사상에는 상무정신이 강하다. 군사문제에 관심이 컸고, 제자들에게 무술을 가르쳤다. 임진왜란을 일찍이 예견해 제자들에게 대책을 묻기도 했다. 그의 제자들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끈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홍의장군’ 곽재우가 대표적이다.

곽재우는 전통적인 수성전(守城戰)이 아닌 유격전으로 왜군을 타격했다. 위장전술을 써서 적을 유인했고, 병사를 매복시켜 급습하는 전술을 썼다. “훈련되지 않은 소수의 군사로 일본의 정예군사를 대적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경남 의령에서 왜군과 싸울 때 곽재우는 부하 10여명을 뽑아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게 했다.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는 ‘가짜 곽재우’를 왜군이 “천신이라고 생각하여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니” 싸움은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국가 재건을 위해 제대로 된 국방정책의 수립을 강조했다. 유민을 모아 육군을 양성하고, 산성 건설을 주장했다.

◆“딸을 낳아도 좋소.”

“밤중에 와도 즉시 갈 것이니 부디 즉시즉시 사람을 보내소.” 조선 중기 문인 곽주가 아내 진주 하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 내용 중 일부다. 뭐가 그리 급했을까. 출산을 앞두고 친정에 가 있는 하씨의 상태가 걱정돼 곽주가 조바심을 부린 것이다. 선비하면 떠올리게 되는 아내 혹은 집안에 대한 무심함과는 거리가 멀어 흥미롭다. 다른 편지를 읽어보자. “비록 딸을 낳아도 절대로 마음에 서운하게 여기지 마소. 자네 몸이 편하면 되지 아들은 관계치 아니하네.” 편지에는 6명의 딸 이름이 나오는데, 하씨는 첫아들을 낳기 전 딸을 여러 명 두고 있었다. ‘딸부자’ 곽주의 태도는 아들을 중시했던 조선 양반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르다.

하씨는 곽주의 두 번째 아내였고, 두 사람이 결혼할 당시 전처가 낳은 자식이 있었다. 하씨와 전처 자식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곽주는 3년 정도는 같이 살아야 한다고 달래다가 해결이 되지 않자 결국 “제각기 들어갈 집을 짓고 제각각 살기”로 결정하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조선 사회가 남긴 문자 기록물 중 부부 생활을 가장 진솔하게 보여주는 것이 한글 편지다. 공식 기록이나 개인 문집, 일기에도 볼 수 없는 솔직한 모습이 들어 있다. 경북대 백두현 교수는 ‘한글 편지에 담긴 사대부가 부부의 삶’의 서문에서 “부부간의 편지에는 인생 역정의 온갖 풍상을 함께 치러내는 부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적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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