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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열의경제수첩] ‘양치기’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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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10-09 22:17:53 수정 : 2015-10-09 23:5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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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등 먹통된 가계빚… 비판·견제 본분 잊고 당국은 ‘쉬쉬’ 한통속
누군가 소리쳐야 한다 “늑대가 나타났다고…”
그리스는 2000년 대대적으로 통계를 조작했다. 재정적자를 줄이려고 연금, 방위비 등 온갖 지출을 장부에 기재하지 않았다. 물가상승률을 낮추려고 토마토가 비싸면 소비자가격 지수에서 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그리스 통계청장은 마술사와 같았다. 부채를 감쪽같이 사라지게 했다. 논픽션 작가 마이클 루이스는 저서 ‘부메랑’에서 그리스의 통계 조작 실상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화려한 통계는 초라한 현실을 가렸다. 그렇게 성공한 유로존 가입은 국가 파산의 시작이었다. 장부상 우량국가가 된 그리스는 마음대로 돈을 빌려 썼다. 미래수입까지 증권화해 유통시키며 자금을 조달했다. 빚으로 즐기는 파티는 서서히 그리스를 파산의 절벽으로 몰아갔다. 이상한 점은 이 엄청난 거짓이 들통나기까지 근 10년간 그리스 내부에서 어떤 경고음도 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한통속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게 마이클 루이스의 진단이다. 

류순열 선임기자
모두가 한통속. 한동안 눈길을 붙잡은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이 여섯 음절은 집단의 오류가 초래하는 위기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로 번뜩였다. 비판과 견제 기능을 상실한 채 한쪽으로 몰려가는 사회가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할 수 있는지 그리스는 유감없이 보여줬다. 모두들 탐욕에 들떠 벼랑으로 몰려갈 때 정부와 시장 어디에서든 정신이 번쩍 들게 경고음을 울려줬다면 그리스의 운명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어디 그리스뿐이랴. 30대 어부가 어느 날 갑자기 은행 외환 트레이딩 부서 직원으로 변신할 만큼 나라 전체가 헤지펀드화한 아이슬란드, 인구보다 더 많은 주택을 건설할 정도로 부동산 광풍이 불었던 아일랜드도 모두 한통속으로 질주하다 과잉과 탐욕의 부메랑을 맞고 고꾸라진 나라들이다. 먼 나라 얘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국 사회에도 ‘모두가 한통속’의 위험이 깊이 똬리를 튼 지 오래다. 위기가 닥칠 때까지 정부의 경고 장치가 먹통이 되는 일은 반복되고 있다. 한통속으로 내달리면서 속도 제어의 필요성을 망각하거나 모른 체한 결과다. 멀리는 외환위기, 가까이는 저축은행 사태가 그랬고 지금은 가계부채 문제가 또한 그렇다.

저축은행 부실 문제는 2010년 봄부터 공공연히 위험성이 거론되던 시한폭탄이었다. 그럼에도 경기부양 명분에 치이고 국제행사(2010년 가을 G20서울정상회의) 체면치레에 밀려 경고 기능은 먹통이 됐다. 경기를 띄우려 위험을 잔뜩 키워놓고 “잔칫상에 재뿌리지 말라”며 부실을 덮어버린 건데, 그렇게 부실 정리가 지연되면서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게 저축은행 사태였다.

가계부채 문제도 판박이다. 한국 경제의 뇌관으로 지목된 지 오래인데도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줄기차게 가계부채를 늘리는 정책을 폈다. 우려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계부채(소규모자영업자 부채 제외)가 877조원이던 2011년 6월 김석동 당시 금융위원장은 “밤잠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그걸로 끝이다. 이런 걱정조차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감독당국의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가계부채는 1130조원(2015년 6월 말)으로 30% 가까이 증가했다.

경고의 골든타임은 오래전에 지나갔다. 감독당국의 직무유기다. 성장을 위한 정책이 안정을 위한 감독을 압도한 결과다. 김홍범 경상대 교수는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은 감독당국이 제때 경고음을 울려야 하는 본분을 잊고 정부 정책에 맞춰 스스로 자기검열하는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늑대가 나타나 양들이 잡아먹힐 지경인데도 소리치지 않는 목동. 작금 금융당국의 모습이다. 금융감독원 직원들 사이에선 “우리 정체성이 뭔지 모르겠다”는 자조가 새나온다. 밤잠 못 이루게 하던 그의 걱정은 여전하다. “과부채만큼 무서운 게 없지. 과부채로 1997년에 망해봤잖아.”

류순열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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