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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권력에 밀리고… 자본의 냉혹한 현실 한계… 문예지 설 곳을 잃다

입력 : 2015-10-08 20:28:06 수정 : 2015-10-08 22:4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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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봄 창간 ‘소설문학’ 잠정 휴간
원고 청탁 않고 온전히 투고 작품만 고집
의미있는 실험 불구 무관심에 정착 실패
만성적 적자 타개 위해 무크지 전환키로
“3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잠정 휴간하게 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지만, 창간작업에 관여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실험은 처음부터 ‘실패하는 데 성공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됐습니다. 교란되고 왜곡된 문학생태계에서 옳고 바른 의도를 가진 한 문예지가 문학장의 외면과 시장의 무관심 속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사실상 폐간에 이르게 됐다는 사실 자체가, 현재 우리 문학의 조건이 얼마나 불구적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실증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문학’ 2015년 가을호 표지.
2013년 봄호로 창간한 ‘소설문학’의 변신에 대한 소설가 김도언의 소회다. 그는 신승철 구경미 김이은 김나정 편집위원들과 더불어 의욕적으로 실험했던 이 잡지의 주간이기도 하다. 소설가 이순원을 기획특집으로 내세운 이 계간지 가을호 사고에서 편집위원을 대표한 소설가 신승철은 “재정 적자를 감당하기 어렵고 새로운 문예잡지의 순기능을 논의하기 위해 가을호를 끝으로 무크지로 전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고만고만한 작가들이 이 잡지 저 잡지에 단골로 등장하면서 한국문학판이 결과적으로 왜소해지는 흐름을 타파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였다. 이른바 ‘문학권력’에 의해 초청된 몇몇 작가들만 부각되는 세태에서 청탁을 하지 않고 순전히 투고된 작품들 중에서만 선별해 소설만 전문적으로 싣는 잡지를 기획한 결실이 ‘소설문학’이었다. 

‘세계의문학’창간호(1976년 가을)
이 계간지는 매호 이런저런 이유로 잊혀졌거나 오랫동안 소설을 손에서 놓은 명망 있는 작가들에게 작품을 청탁해 작가와의 대담도 곁들여 간판으로 내세웠다. 20년 만에 신작을 발표한 박인홍 김형경을 비롯해 최창학 이외수 윤정모 윤후명 서영은 문형렬 이병천 이순원 등이 이 지면에 등장했다. 11호를 만들어오는 동안 작가 118명 121편의 작품을 수록했다.

‘세계의문학’ 창간 당시 편집위원을 역임한 문학평론가 유종호.
김도언 주간은 “고답적인 한국문학판에 의미 있는 균열을 내고자, 전면 투고제라는 한국 문예지 역사상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최소한의 제도’를 도입해 모든 작가들에게 지면을 개방한 점은, 현단계 문예지의 한계와 문학권력의 문제를 풀 수 있는 하나의 솔루션으로 충분한 검토와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대안매체로서 시도해볼 수 있는 처방을 내리고, 하나의 시사점을 던졌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다”고 덧붙였다.

‘세계의문학’ 창간 당시 편집위원을 역임한 문학평론가 김우창.
시장 논리를 따라 자생하는 잡지가 아니라 조현석(시인) 도서출판 북인 대표의 전적인 희생에 기댄 결실이었다는 점이 이 같은 현실에 도달한 가장 큰 요인일 터이다. 독자들의 호응이 있었다면, 혹은 자본력이 더 컸다면, 명분이 훌륭한 만큼 충분히 지속할 만한 여지는 있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한국문학을 수용하고 유통하는 채널 자체가 소수자로 좁혀진 세태에서는 새로운 변신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근본 환경을 부정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윤후명.
‘발전적 해체’라고는 하지만 창간 39년 만에 정간 예정을 밝힌 ‘세계의 문학’이 이러한 흐름을 웅변한다. 겨울호 발간을 끝으로 제호를 바꾸는 것을 포함해 웹진 형식까지 포괄하는 변신을 도모할 예정이라고 한다. 1976년 가을호로 민음사에서 발간하기 시작한 이 문예계간지는 지금은 김우창 유종호를 편집위원으로 내세워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과 더불어 3각 구도를 정립해 한국문학을 견인해 온 공이 크다. ‘오늘의 작가상’을 신설해 한수산 박영한 이문열 등 유수의 작가들을 발굴했고 이른바 본격문학을 대중들과 소통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소설문학’을 통해 오랜만에 작품을 발표한 소설가 이제하
이러한 위상을 지닌 문예지가 역설적으로 작금에 이르러서는 대중 독자들에게 외면 받는 소수자의 처지가 됐다. 박근섭 민음사 대표는 이 잡지의 최근 정기독자가 30명이라고 한 매체에 밝힌 바 있다. 진작부터 다른 문예지들도 적자는 감수해오고 있는 형편이었다. 문예지가 ‘문학권력’과 자사에서 출간할 작가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측면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 매체들의 역할과 소명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문학의 중심을 견인하며 의미 있는 작품과 발언을 확보할 창구는 여전히 필요하다. 소설가 이인성이 최근 사단법인 ‘문학실험실’을 만들어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철저하게 문학적인 새 문예지 ‘쓺’을 창간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세태 변화와 자본의 냉혹한 현실 앞에서 문예지들이 풀어나가야 할 숙제는 갈수록 복잡한 형편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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