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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의 거장 31人 ‘1300년 사색’

입력 : 2015-10-01 20:59:34 수정 : 2015-10-01 20:5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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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교수 ‘한국철학사’ 펴내
“(조선 성리학은) 마르크시즘의 유물사관에 따라 봉건적 관념론으로 폄하되었고, 민주화의 시대에 그저 체제 수호를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적대시되었다.…한국철학은 돌아볼 가치도 없는 그야말로 쓰잘데없는 물건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전호근(경희대 철학과 교수)이 ‘한국철학사’(메멘토) 서문에서 밝힌 1980년대 후반의 한국에서 성리학을 비롯한 한국철학 위상이다. 사뭇 격한 문장이지만 30년 정도 지난 지금도 사정이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공감을 자아낸다. 전호근은 책을 쓰며 “한국철학의 거장들이 추구하고 실천했던 삶의 문법이 아직도 한국인의 의식 저변에 깔려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 곳곳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적었다. 그는 1300년의 시간 속에서 원효부터 장일순까지 31명 ‘한국철학의 거장’을 불러낸다. 특정 시대를 대표할 만한 거장들의 사유와 삶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크다.

◆조선 주자학의 ‘독창성’ 이황과 ‘완성자’ 이이

이황이 58세 때 23세의 이이가 찾아왔다. 만남 끝에 이이가 시를 써두고 떠났는데, 누군가 “사람은 시원찮은데 시는 참 좋다”고 하자 이황은 “시가 사람만 못하다”고 답했다. 이황은 한참이나 어린 이이를 동료 학자로서 대접했고, 이이는 이황을 당대의 스승으로 예우했다. 서로의 진가를 알아본 두 사람이었지만, 삶과 철학에서는 다른 점이 적지 않았다. 

이황은 조선 주자학의 절정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황은 당대 사림의 최고 명망가로서 조정의 간곡한 부름을 물리치고 평생 학문적 열정을 불태운 인물이었다. 성균관 대사성이나 홍문관 대제학 등 명예직을 맡은 적이 있긴 했지만 금방 그만두고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갔다. 이이는 적극적으로 관직에 나가 누구보다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20여년간 황해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상대를 달리하며 각자가 뛰어들었던 철학 논쟁에서는 생각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황은 기대승과 8년간 벌인 ‘사단칠정논쟁’에서 “이(理·본체와 정신, 본질, 목적 등에 해당하는 주자학의 개념)가 단독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지적을 받아들이지만 이가 기(氣·현상과 신체, 물질, 도구 수당 등의 개념)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이이는 친구인 성혼과 ‘인심도심(人心道心)논쟁’을 벌였다. 그는 이 논쟁에서 고봉(기대승의 호)의 입장을 계승하며 “항상 이와 기가 같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이는 조선 주자학의 절정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전호근은 이황에 대해 “이를 강화하는 쪽으로 주자학을 전개해 당시 조선의 사회적 혼란상을 주자학 이론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극복하려 한 독창성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이이에 대해서는 “주자학의 논리 구조를 제대로 파악해 ‘주자 또한 잘못한 것’이라고 비판할 정도로 자주적 학풍을 중시했고, 이론의 완결성을 두고 말하면 이이를 꼽지 않을 수 없다”고 소개한다.

◆‘5000년 최고의 문장’ 박지원과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은’ 정약용

고려 말 안향이 주자학을 도입하고 200여년이 지난 1536년 이이가 태어났다. 이이의 등장은 조선 주자학의 절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시 200년 정도가 흘러 주자학에 근거한 질서는 무너지는 상황을 맞는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박지원(1737년생), 정약용(1762년생)이다. 두 사람 모두 새로운 가치관과 방식을 제시해 세상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방식은 달랐다. 

박지원은 조선 후기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며 세상을 바꾸려 한 철학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박지원은 하층민들 이야기를 뛰어난 글을 통해 드러내 그들의 가치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그는 ‘북학의서’(北學議序)라는 글에서 “학문하는 도리는 다른 것이 없다.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는 것이 옳다”고 적었다. 그래서 뛰어난 가문 출신 양반임에도 하인, 참외 장수, 돼지 치는 사람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었고, 글의 소재로 활용됐다. 공맹의 도리를 실천한 거지 광문,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는 말 거간꾼, 재산을 탕진하며 온 산을 돌아다닌 김홍연 같은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아무리 하찮다고 해도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태도로 가득한 것이 박지원의 글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며 세상을 바꾸려 한 철학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정약용은 직접적인 제도 변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박지원과 차이를 보였다. 특히 민생과 직접 관련된 제도 개혁에 관심이 많았다. 박지원이 과부의 참혹한 실상을 전한 ‘열녀함양박씨전’을 쓰면서도 열녀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않은 반면 정약용은 ‘열부론’에서 “열녀라는 제도는 천하의 악습”이라고 비판한 것을 일례로 들 수 있다.

그는 주자학의 핵심 개념인 ‘인’(仁)을 인간 내면 덕성으로 본 기존 해석과 달리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도리를 극진히 하는 것”으로 인식해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도리로 파악했다. 인이라는 핵심 개념을 달리하는 데서 “자기수양 못지않게 이용후생을 중시하는 실학의 유학적 근거가 비롯된다”고 전호근은 설명한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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