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古詩로 그린 18세기 한양의 풍경

입력 : 2015-09-12 00:00:00 수정 : 2015-09-12 00:00:0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새 세상 꿈꿨던 규장각 수재들 13명, 정조에 지어 올린 시 현대어로 풀어
서양 문물 들어와 활기찬 도시 풍경
백성들 삶·풍물 등 생동감 있게 묘사
박현욱 옮김/보고사/2만2000원
성시전도시로 읽는 18세기 서울-13종 성시전도시 역주/박현욱 옮김/보고사/2만2000원


1792년 6월 정조는 자신이 뽑은 규장각 수재들에게 하명했다. 도성 한양의 모습을 그림처럼 묘사한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를 지어 올리도록 한 것이다. 100운 7언 고시로 시제를 내렸고 단 사흘의 말미를 주었다. 정확히 3일 뒤 정조는 이들이 지어올린 시를 직접 읽고 점수를 매기면서 평도 달았다. 1등은 병조정랑 신광하, 2등은 검서관 박제가, 3등은 검교직각 이만수였다. 승지 윤필병, 겸검서관 이덕무, 유득공이 공동 4등을 했다. 시문에 나름 조예가 깊었던 정조는 1등을 차지한 신광하의 시를 ‘소리가 있는 그림 같다(有聲畵)’고 평가했다. 2등 박제가의 시는 ‘말을 알아 듣는 그림 같다(解語畵)’고 해설하기도 했다. 이덕무의 시는 우아하다 했고, 유득공의 시는 ‘모두가 그림 같다’고 칭찬했다. 정조는 아끼는 제자들과 이처럼 교류하면서 국정의 고단함을 달랬을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의 박현욱 학예연구부장이 쓴 이 책은 18세기 한양의 모습을 비교적 사실감 있게 전하고 있다. 저자는 모두 13개의 시를 현대어로 풀이하고 해설을 곁들였다. 이들이 정조에게 지어 올린 시를 통해 당시 한양의 풍물과 인정 세태를 짐작할 수 있다. 상당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문학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정조대의 한양의 모습과 백성들의 삶, 풍물 등을 소개하기는 이 책이 처음이라고 저자는 전한다.

이집두가 정조에게 지어올린 성시전도시. 당시 한양의 모습을 묘사한 내용으로 전해진다. ‘차상’이라는 붉은색 글씨가 적혀 있다.
정조가 자신이 키운 제자들에게 이런 시를 짓게 한 데에는 복잡한 속내가 있었을 것이다. 느닷없이 이런 ‘한담’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통치하는 한양의 모습을 자랑하려는 의도였을까. 아니면 기득권을 쥔 노론세력이 좌지우지하는 정국을 혁파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분위기 조성 차원의 밑그림이었을까.

당시는 사신으로 중국 연경을 왕래하면서 서양 문물에 눈 뜬 실사구시 인재들이 다수 등용되던 시대였다. 지배층 양반 관료들의 대의명분이었던 성리학은 이미 힘을 잃었고, 젊은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과도기였다. 연행을 통해 서양의 선진 문물이 한양에 전해지면서 북학파가 생겨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를 기회로 포착한 정조는 기득권을 누리던 사대부들을 누르고 개혁을 펼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나 너무 일찍 세상을 뜨면서 자신의 개혁은 포부에 그치고 말았다.

정조가 서울의 모습을 그린 시를 지어 올리게 한 것은 실사구시의 당시 학풍을 장려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이 가운데 박제가의 성시전도시를 보자.

조선 영조 때 문신인 담와 홍계희가 그린 좌의정 행차도. 길거리 서민들이 얼굴을 내밀고 구경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보고사 제공
“우리나라 줄타기는 세상에 없는 것이라/ 줄 위를 걷고 공중에 거꾸로 서는 것이 거미가 매달린 듯/ 따로 꼭두각시 있어 마당에 오르려는 참에/ 칙사가 동쪽에서 나와 따귀를 한 대 치네/ 새끼 원숭이 실감나게 아녀자와 아이들에게 으르렁대고/ 사람의 뜻을 알아들어 무릎 꿇고 절도 잘 하네.”

시는 운종가에서 벌어지는 줄타기의 아슬아슬한 묘기를 거미에 비유하면서 원숭이의 표정과 몸놀림을 실감나게 전달한다.

박제가의 시는 성시전도시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시에서는 자연 경관과 공간 같은 부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시장과 거리풍경, 사람과 동물의 움직임을 세밀히 묘사하여 생동감과 해학이 넘치는 시를 지어냈다.

정조가 등용한 인재들은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인물들은 백탑 주변 탑골 근처에 살던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등과 남산 자락에 살았던 홍대용, 박제가 등이다. 이들은 수시로 만나면서 조선의 앞날을 놓고 토론하곤 했다. 후세인들은 이들을 ‘백탑파’로 이름 붙였다.

양반가 자제들이면서도 일부 서얼 신분이었던 이들은 신분을 떠나 정조의 개혁 정치를 우회적으로 지지했다. 실권이 없었던 ‘젊은 그들’은 시로 세태를 논하고 한탄했을 것이다. 권문세가끼리 친인척을 맺고 대대로 벼슬을 독점하는 세태를 비판했고, 환곡을 나누어주며 수량을 속이는 하급관리의 부패를 꼬집었다. 중앙의 세도정치와 지방의 문란한 행정 등 부조리한 현실은 임금인 정조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구 20여만명을 헤아리는 당시 한양은 북적였다. 청을 통해 서양 문물이 전래되면서 활기찬 도시로 바뀌고 있었다.

백탑파 인사들이 지어 올린 시에는 한강에 세곡을 보관하는 수많은 창고가 줄지어 늘어서 있고, 조운선과 어선 등 2000여척이 떠다닌 내용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조선은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폈지만 초파일이면 정월대보름만큼 많은 등이 달렸고, 돌팔매질 놀이인 석전을 하다가 이마가 깨지거나 팔이 부러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내용도 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
  • 오마이걸 유아 '완벽한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