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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구두의 처녀… 누구엔 빨강, 누구엔 검정… 전체주의 속성 패러디

입력 : 2015-09-10 17:41:46 수정 : 2015-09-10 17: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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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 연작소설 ‘빨간구두당’ 출간
올여름 독자와 전문가들이 함께 뽑는 ‘오늘의 작가상’을 처음 수상하며 저력을 과시한 소설가 구병모(39·사진)의 연작소설집 ‘빨간구두당’(창비)이 출간됐다. 그림 형제, 안데르센, 러시아와 유럽 민담 등 유명한 동화를 바탕으로 현란한 비유와 상상력을 동원해 새롭게 그려낸 소설들이 포진한 책이다. 이를테면 빨간 구두를 신고 미친 듯이 춤을 추다 구두를 벗지 못한 채 두 발목을 잘라야 하는 안데르센 동화에서는 전체주의의 속성을 표제작인 ‘빨간구두당’으로 패러디한다.

이 단편에서 구병모는 검은색과 회색 흰색만 존재하는, 색이 사라진 곳을 설정했다. 이곳 사람들에게 “초록 나뭇잎이 늦가을에 붉게 물든다느니, 무거워져 허리를 숙인 노란 곡식의 물결이 끝없이 펼쳐진다느니 하는 말들은 전설에 불과”한 것이었다. 상처에서는 검은 피가 흐르고 회색 새들이 검은 나뭇잎을 입에 물고 날아갔다. ‘색 없는 세계’에서는 감정 표현 수단조차 부족했다. “언제가 분노와 쾌락과 무절제가 허용 한계를 넘어선 적이 있어 신들이 채찍을 휘둘러 모든 것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두되 다만 색깔들만 떨어낸 자리 같기도 했다.”

이 공동체에 한 처녀가 빨간 구두를 신고 나비 같은 발걸음으로 나타났는데, 소수의 사람들이 빨강을 알아보고 경악했다. 춤추는 처녀를 따라 같이 춤추는 무리가 생겨났다. 누구에겐 빨강이 보이고 다른 누구에겐 평소처럼 검은색만 보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파시스트가 지배하는 전일한 통제의 균열을 비유하는 대목일 터이다. 처녀는 “오랫동안 색이 보이지 않고도 건실히 잘 살아온 마을 사람들을 춤과 향락에 빠뜨린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최후 변론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재판관은 두 발목을 자르라고 명한다. 구두가 신겨진 잘린 발목을 불길에 던져도 그것은 다시 뛰쳐나와 주인도 없이 홀로 춤을 추었다. 그 발목을 따라 춤을 추기 시작한 일군의 백성을 ‘빨간구두당’이라 일컫기 시작했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는 소녀가 추운 거리에서 성냥으로 환상을 만들다가 얼어 죽는 결말이지만 짐짓 아름다운 이야기로 그 비참을 포장한다. 작가는 이를 패러디한 ‘화갑소녀전’에서 성냥불을 그을 때마다 판타지 대신 살벌하고 비극적인 현실을 불러낸다. 이 소설집에는 이 밖에도 그림형제의 ‘개구리왕 또는 강철의 하인리히’ ‘황금 거위와 웃지 않는 공주’ ‘노래하는 뼈’ ‘농부와 악마’ ‘유리병 속의 작은 도깨비’ 등을 녹여냈다.

구병모는 “각 단편 속에는 일대일 식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한 가지 화소의 이야기만 들어 있지 않으며, 당신이 살아오면서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 봤을 법도 하지만 그것의 출처가 정확히 누구의 어디였는지는 살짝 가물가물한 여러 개의 원본 화소들이 혼재해 있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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