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편에서 구병모는 검은색과 회색 흰색만 존재하는, 색이 사라진 곳을 설정했다. 이곳 사람들에게 “초록 나뭇잎이 늦가을에 붉게 물든다느니, 무거워져 허리를 숙인 노란 곡식의 물결이 끝없이 펼쳐진다느니 하는 말들은 전설에 불과”한 것이었다. 상처에서는 검은 피가 흐르고 회색 새들이 검은 나뭇잎을 입에 물고 날아갔다. ‘색 없는 세계’에서는 감정 표현 수단조차 부족했다. “언제가 분노와 쾌락과 무절제가 허용 한계를 넘어선 적이 있어 신들이 채찍을 휘둘러 모든 것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두되 다만 색깔들만 떨어낸 자리 같기도 했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는 소녀가 추운 거리에서 성냥으로 환상을 만들다가 얼어 죽는 결말이지만 짐짓 아름다운 이야기로 그 비참을 포장한다. 작가는 이를 패러디한 ‘화갑소녀전’에서 성냥불을 그을 때마다 판타지 대신 살벌하고 비극적인 현실을 불러낸다. 이 소설집에는 이 밖에도 그림형제의 ‘개구리왕 또는 강철의 하인리히’ ‘황금 거위와 웃지 않는 공주’ ‘노래하는 뼈’ ‘농부와 악마’ ‘유리병 속의 작은 도깨비’ 등을 녹여냈다.
구병모는 “각 단편 속에는 일대일 식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한 가지 화소의 이야기만 들어 있지 않으며, 당신이 살아오면서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 봤을 법도 하지만 그것의 출처가 정확히 누구의 어디였는지는 살짝 가물가물한 여러 개의 원본 화소들이 혼재해 있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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