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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極地의 시만이 희망… 진실이기 때문이죠”

입력 : 2015-09-10 17:38:45 수정 : 2015-09-10 17: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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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집 3권 펴낸 이성복 시인 “어떻게도 이름 붙일 수 없는, 헐벗고 누추한 것들의 유배지가 극지예요. 말할 수 없는 것은 휘파람으로도 불 수 없다고 하잖아요. 아무도 위안해줄 수 없고 위로받을 수 없는 극지에서, 시 말고 무엇이 우리를 견딜 수 있게 해주겠어요. 삶이 극지라면 당연히 시도 그래야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에요. ‘극지’의 시만이 희망이 될 수 있어요. 왜? 진실이기 때문이에요.”

시론집 출간을 계기로 대구에서 상경해 광화문 거리에 선 이성복 시인. 그는 “시인이란 땅속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샘의 입구 같은 존재”라면서 “시인은 쉼 없이 비유를 찾아 흘려보내는 샘”이라고 말했다.
이성복(63) 시인은 “시가 지향하는 자리, 시인이 머물러야 하는 자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도 나아갈 수 없는 ‘극지’”라고 설파한다. 그가 최근 문학과지성사에서 동시에 펴낸 세 권의 시론집(사진) 중 ‘극지의 시’ 첫머리에서 강조하는 시론이다. 나머지 두 권은 ‘불화하는 말들’과 ‘무한화서’라는 표제를 붙인 책인데 세 권 모두 시집 판형에 아포리즘이나 시, 산문과 대담 형태로 부담 없이 읽힐 수 있도록 정리한 게 특징이다. 대부분 시인이 2002년부터 2015년까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행한 수업과 학교를 그만둔 뒤에도 찾아오는 졸업생들과 공부하면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녹취해 정선한 것들이다.

“시 쓰기는 세상과 자신에게 민감해지는 일이에요. 시인은 인생과 발가벗고 동침하는 사람이에요. 무엇보다 자기에게 절실해야 해요. …시 쓸 때 들어가는 문은 가려움, 나가는 문은 따가움, 들어가는 문은 부질없음, 나가는 문은 속절없음이에요. 언제나 가까운 데서 찾고, 다른 데서 가져오려 하지 마세요. 무엇보다 자기에게 절실해야 해요. 쓰고 나서 많이 아파야 해요.”

‘불화하는 말들’은 시처럼 짤막하게 행갈이를 해가며 속삭이듯 전해주는 시론들을 담았다. 그는 시에 대해 말하고 또 말한다.

“걸레를 비틀어 짜면 땟물이 뚝뚝 떨어지지요./ 그처럼 시를 쓰면 얻어지는 부분이 있어야 해요./ 말의 비틀림을 통해 내가 누군지 알게 되고,/ 속절없지 않은 삶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선생은 입구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도, 안으로 들어가는 건 여러분 몫이에요.// 글쓰기가 자기 근육에 입력돼 있어야 해요./ 씨름할 때 상대에게 딱 달라붙어야/ 힘을 쓸 수 있잖아요.// 시 쓸 때도 남 얘기하듯 하지 말고,/ 무조건 달라붙어야 해요./ 좀더 간절하게, 절박하게, 속절없이….”

‘무한화서’는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 곧 ‘꽃차례’를 의미하는 ‘화서(花序)’에서 따온 제목이다. 시인은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성장이 제한되지 않은 무한화서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대학원 시 창작 수업 내용을 아포리즘 형식으로 정리한 이 책에서는 축구 선수들에 비유한 시인의 존재가 인상적이다.

“축구 경기에서 끝까지 무승부가 되면, 양 팀 선수들이 승부차기를 해요. 그때 한 선수가 골대를 향해 가면, 다른 선수들은 스크럼을 짜고 격려를 하지요. 기독교 박해시대 때 형장으로 들어서는 순교자를 다른 교우들이 격려할 때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시를 쓰는 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사 앞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을 위해 스크럼을 짜는 게 아닐까 해요.”

이성복은 시론집 출간을 계기로 대구에서 상경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문학이란 절망과 마주하는 일”이라면서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맞불을 놓아 산불을 끄는 것처럼 절망으로 대처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시는 어떻게든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 잠 못 들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면서 “문학은 직접 뛰어들어 불행을 극복해줄 수는 없지만 홀로 승부차기하는 선수를 위해 마지막 스크럼을 짜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지요. 사마귀가 겁없이 수레 앞에 버티고 서서 한번 해보자고 덤비는 것이지요. 참 말도 안 되는 한심한 짓이지만, 시도 그런 것 아닐까 해요. 아름드리 나무기둥을 뽑겠다고 부둥켜안고 용써보는 것.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 실패 안 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올 인’하는 것. 그거라도 안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어요.”

그는 새로 낸 책 앞에 서명을 하면서 “아픈 새끼발가락, 이것이 시!”라고 써넣는다고 했다. 최말단 하찮게 여겨지는 것 하나가 고장 나면 움직일 수도 뛸 수도 없다는 걸, 그 하찮은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된다고 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속절없는’ 존재가 시요, 문학이라는 언설이다.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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