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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아이디어는 어떻게 현실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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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9-04 20:27:07 수정 : 2015-09-04 20: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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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의 상큼함 산문같은 다큐영화
편집의 맛 만끽… 직업병이라도 좋아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영화관에 간다. 매번 새롭게 상영되는 영화가 있다는 건 일상의 축복이다. 최소 몇 억원, 많게는 몇백 억원의 제작비가 투자된 한 편의 작품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이런저런 혜택으로 만 원조차도 지불하지 않게 될 때는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책을 만드는 직업을 가졌으니 종종 영화산업과 출판산업의 투자 대비 산출 효과, 문화 효용성, 사회적 파급 효과까지도 엮어서 고민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지점만 벗어나면 담백한 관객의 입장에서 감상할 수 있다. 책도 그렇듯이 유독 선호하는 영화의 장르가 있으니 다큐영화가 그것이다. 지난주에는 국제다큐영화제까지 있었으니 신나기까지 했다.

극영화와 다큐영화를 볼 때는 아예 감상 자세가 다르다. 극영화는 인물 캐릭터와 스토리텔링, 컷과 컷 사이, 나 나름대로 파악한 완성도의 결과가 흡족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다큐영화에서는 편집의 묘미를 즐긴다. 결론에 이르기까지 편집력을 유심히 따져본다. 극을 가미하지 않은 사실 기록이 다큐영화라는 정의가 있지만, 사실들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극적인 효과는 확연히 달라지니까. 감독의 편집력이 다큐영화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시인
수전 손택의 사진론까지 빌리지 않더라도 한 장의 사진은, 한 컷의 이미지는 순간을 박제화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최근 본 다큐영화 중에서 단연 흥미로웠던 건 ‘디올 앤 아이’와 ‘우리는 왜 거짓말을 하는가’였다. 그중 ‘디올 앤 아이’는 출판편집자의 정체성을 갖고 사는 내 현실과 맞물려 더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뿜어내었다.

‘디올 앤 아이’는 남성복 전문 디자이너가 갑작스럽게 크리스챤 디올의 수석디자이너로 발탁된 뒤 주어진 8주 동안 오트 쿠튀르를 준비하는 전 과정을 다루었다. 이 영화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평은 김혜리 평론가의 “가장 시적인 옷들이 지어지는 산문적 절차”란 문장이다. 산문적 절차라니. 책의 장르에서도 시, 소설과 달리 산문은 작가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산문은 시적 은유나 소설적 장치 뒤에 숨을 수 있는 작가의 목소리가 날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니, 이 매력은 문학작품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다큐영화에 매혹당하는 내가 책의 장르에서도 유독 산문에 집착하는 것과 상통하는 게 있는 셈이다.

‘디올 앤 아이’는 디자이너의 머릿속에서 생성되는 추상적인 아이디어가 장인들의 손을 거쳐 구체화되는 과정이 급박하게, 치열하게 펼쳐진다. 다큐영화의 특성상 인터뷰가 편집되어 삽입되는데 디자이너의 말과 장인들의 말 사이의 간극, 혹은 충돌, 소통이 이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다. 가령 이런 인터뷰의 말은 책 편집자가 자주 토로하는 말과 통한다. “옷 만들기란 그런 것이에요. 모든 것이 납작하게 널려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훅 올라오죠.” 편집자는 날것의 저자 원고를 받아서 편집 레이아웃을 하고 사진이나 그림을 삽입하고 제목과 카피를 붙이는 동안 이 요소들이 제대로 조화를 이룰까 악몽에 시달린다. 어느 순간 입체적인 책으로 완성된 걸 목격하고 나면 무언가 홀린 듯 도취되면서 책으로 흡수된 그 요소들이 새롭게 반짝거리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머리에서 손으로, 다시 손에서 머리로 이어지는 옷 제작과정 다큐영화는 책의 제작과정과 흡사해서 설득력이 있었다.

다큐영화를 볼 때마다 감독이 전하고픈 메시지를 위해 컷들을 어떻게 편집하는지,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장면 장면의 움직임이 흥미로워 눈을 떼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겠다. 어쩌랴. 병이라도 즐길 수밖에.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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