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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에게도 군번이 있다. 230873번! 제2차 세계대전 때 받은 군번이다. 열여덟 살이던 1944년, 독일의 침공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그녀는 아버지 조지6세 국왕에게 나라에 봉사할 기회를 달라고 졸랐다. 자원입대한 그녀는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 윈저 소위로 복무를 시작한다.

윈저 소위는 군에서 공주의 신분을 내려놓았다.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신병훈련을 받은 뒤 구호품 전달 부대에 배속됐다. 그녀는 트럭 운전병으로 하루 종일 타이어를 바꾸고 엔진을 수리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리더십을 스스로 실천했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고서도 그녀의 겸손은 빛이 바래는 일이 없었다. 국민 위에 군림하는 왕좌에서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려 애썼다. 1955년 여왕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나환자촌을 찾았다. 그때만 해도 나병은 사악한 질병으로 취급되던 시절이었다. 여왕은 주민들에게 나병이 치료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나환자들의 손을 잡았다. 여왕은 평소 극장에 갈 때엔 미리 주위에 알리지 않는다. 객석의 조명이 꺼진 뒤 게걸음으로 조용히 들어간다고 한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몸에 배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이런 겸손의 리더십이 국민을 하나로 묶고 영연방 국가들을 결속시키는 저력이 아니었을까.

엘리자베스 2세가 오는 9일 영국의 최장 통치 국왕으로 새로운 역사를 쓴다고 한다.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종전 재위 기록 2만3226일을 경신하는 것이다. 올해 89세인 여왕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령 국왕이다. 여왕을 향한 국민들의 존경은 가히 절대적이다. 2012년 즉위 60년을 맞아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영국의 가장 위대한 국왕’으로 엘리자베스 2세를 꼽았을 정도다. 현재 영국 왕은 정치권력이 없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그런 여왕이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1세를 모두 제쳤다는 사실은 하나의 사건이다.

남에게 존경을 받으려면 자신의 몸을 먼저 낮춰야 한다. 예수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외쳤다. 그 하심(下心)의 원리를 행동으로 증명한 인물이 여왕이다. 하심의 2만3226일, 여왕이 만든 또다른 신기록이다.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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