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박정진의청심청담] 선군정치의 북한을 염려한다

관련이슈 박정진의 청심청담

입력 : 2015-08-31 21:40:51 수정 : 2015-08-31 23:44:09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북한이라는 암초에 걸린 세계평화
인류의 갈 길은 神에 대한 외경회복
세계가 북한의 전쟁놀이에 잠시 맡겨졌다가 풀려났다. 갑자기 물려받은, 힘에 부치는 권력은 그것을 지키기 위한 심리적 긴장과 갈등, 오해를 불러오고 핵심권력 내부에 헤게모니 투쟁과 함께 정치적 살생부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북한의 정치적 혼란을 항상 불안과 염려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게 한국의 입장이다. 선군정치 탓으로 군부 강경파의 발언이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 온 북한이 만에 하나라도 어떤 실수나 착각으로 사용했다고 하면 민족공멸을 초래할 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핵은 앞으로 사용할 수도 없는 무기이다. 만약 어느 국가나 단체가 핵을 사용했다고 하면 즉시 국제적 비난과 질시로 지구상에서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이를 절실하게 인식하지 못할 개연성이 있다.

박정진 문화평론가·객원논설위원
대내적 공포정치와 함께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한국을 상대로 벼랑 끝 전술로 독재체제를 유지해온 북한은 이제 여러 한계와 국가로서의 소진 상태에 있는 것 같다. 국제사회도 이를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극심한 심리적 공포 상태에 있는 북한은 어쩌면 스스로를 민족의 구원자, 정의의 실천자라고 속이고 위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북한에게 세습체제의 부당함과 처참한 실정을 폭로하는 대북방송, 심리전은 거의 치명적인 것일 수도 있다.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과 이에 대한 보복으로 재개된 남한의 대북방송은 의외로 북한의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남한의 ‘심리적 핵폭탄’과 같은 효과를 이번 지뢰정국에서 보여주었다. 체제 유지도 힘든 북한의 전쟁 공갈이지만 만약의 전쟁 도발에 한·미동맹 체제는 가동되지 않을 수 없었고, 중국까지도 불안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을 실질적 제3차 세계대전이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최근 국제상황을 보면 한국을 중심으로 세계의 열강이 포진해 있고, 다시 세계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한국의 통일은 더 가까워지고 있다.

한반도의 통일은 인간이 과연 세계의 항구적 평화와 ‘평화로운 지구촌’을 달성할 수 있는지의 시금석이 되고 있다. 세계의 많은 미래학자들은 한국의 통일이 세계평화의 달성 여부와 맞물려 있다는 분석을 한다.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분석이다.

인간의 도구적 이성에서 비롯된 정치기술과 과학기술, 그리고 기계적 환경은 지금 한반도 휴전선이라는 경계를 중심으로 그 한계치를 실험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 이성의 보편사적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세계평화론’은 지금 북한이라는 암초에 걸려 있다. 이성의 도구적 성격과 목적적 성격이 심각한 이율배반에 빠져 있는 것이다.

가공할 전쟁무기와 핵무기는 언제 어떤 아이 혹은 위험한 인물의 손에 들어갈지 모른다. 더구나 핵기술은 이제 세계적으로 고도의 기술도 아니기 때문에 핵확산금지조약의 한계와 함께 언젠가는 구멍이 뚫리고 말 것이라고 예언하는 학자도 많다. 과학기술이 특정국가나 개인에게 독점될 수는 없음은 과학 자체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과학은 지금 인류역사에서 종래 신이 누린 절대자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은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다. 과학은 그동안 인간의 도구였지만 적반하장이 되어 이제 인간을 부리고 있다. 전쟁무기가 국제정세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성과 과학의 도구적 특성은 선악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들었으며, 인간의 정신병리학적 환경은 폭력적 통치자를 배출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게 만든다. 문화권별로 정상적이라고 생각되는 행동도 그 문화권을 벗어나면 정신병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정신병적 동물임을 염려하게 된다.

흔히 근대 과학문명시대를 주도해온 서구문명은 과학과 계산적 이성, 도구적 이성에 심하게 의존한 나머지 ‘신은 죽었다’는 선언에 이르게 되었고, ‘신의 죽음’은 도리어 인간으로 하여금 ‘물신(物神)’에 빠지게 하였다. 현대의 인류는 물신에 빠지고서야 ‘신’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이 발견한(깨달은) 가장 훌륭한 가상실재이며, 동시에 가장 근본적인 실재인지도 모른다. 신은 그 경계에서 양쪽을 오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신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천지의 창조와 종말을 손에 쥐게 되었으며, 거꾸로 해석하면 시작과 끝에 이름을 붙인 자를 신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인간은 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삶 자체가 신이며, 그런 점에서 신은 자연이며, 생명이다.

과학은 신비와 존엄(존경과 외경)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한계에 직면하게 되어 있다. 동서양은 모두 경(敬) 혹은 외경(畏敬)을 회복해야 함은 물론이고 과학의 적이라고 여기는 신비(神秘)를 덕목으로 삼아야 할지 모른다.

박정진 문화평론가·객원논설위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