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나던 해 신안군 비금도로 피난 들어가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7년 만에 목포로 나왔습니다. 내 생애 10분의 1을 그곳에서 보냈지만 그때 배운 것들이 기억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조선 중기의 말까지 살아 있었지요. 후일 내가 배운 프랑스어는 라틴어의 뿌리가 순수하게 살아 있는 세계 표준어에 해당합니다. 나는 이 두 언어 사이를 오가면서 정확하게 쓰는 훈련을 한 셈입니다. 내 글은 미문이라기보다 까칠한 편입니다.”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암 투병 중에도 오래 공들여 번역한 ‘보들레르 산문시집’을 최근 펴냈다. 그는 “한국 문인들은 시는 잘 쓰는데 서사 능력은 부족한 것 같다”며 “끝까지 강인하게 밀어붙이는 소설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남제현 기자 |
“신경숙은 시장성이 큰 대중작가인데 문학이 원래 지니고 있는 아우라나 카리스마를 대중성과 굉장히 잘 연결시킨 거지요. 신경숙뿐 아니라 몇몇 작가들의 작품은 대중성과 시장에서의 성공을 비평가들이 바꿔치기한 측면이 있습니다. 문학권력을 통해서만 그리된 게 아니라 신경숙을 좋아한 일반 대중도 신경숙을 열심히 따라 읽었기 때문에 신경숙이 특별히 문학적 가치가 있기를 바란 겁니다. 그 점에서 문학판과 공모한 독자들도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는 올봄 두 달 가까이 트위터를 쉰 적이 있다. 담도암이 발견돼 수술을 받고 한 달 반 가까이 입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를 팔로어하는 트위터리안들에게는 그냥 “일이 있어서 쉰다”고만 공지했다. 10월까지 항암치료를 계속해야 한다는 그는 목소리에 힘이 없고 피로한 낯빛이었지만 차분하게 정감 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고민하고 있을 때 한숨 자고 나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거라고들 말하지요. 밤이 좋은 생각을 가져다 준다는 의미의 프랑스 속담이 있는데 ‘밤이 선생’이라고 웃자고 말했다가 책 제목으로 쓰게 됐습니다. 밤에 작업을 하면 무의식이 작동해서 낮에 생각한 것과 많이 다릅니다. 밤을 새워 읽고 쓰다가 새벽 5시쯤 잠이 드는 생활을 오래 해왔는데 수술을 받고 난 다음부터는 패턴이 무너져서 이것저것도 아닙니다.”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대학시절부터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생계의 무게 때문에 대학원조차 출판사에서 일을 하며 다녀야 했다. 낮의 노동에서 복귀해 아무리 피로해도 밤에는 책을 붙들고 씨름했던 패턴이 밤을 선생으로 삼게 된 내력이다. 45세에 문화예술진흥위에서 청탁한 200자 원고지 100장 분량이 호평을 받으면서 소문이 나기 시작해 자연스레 문학평론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추천이나 등단 과정을 거친 게 아니라 비록 늦깎이이지만 순수하게 그의 글이 지니는 힘만으로 세상에 드러난 셈이다. 이후의 과정도 마찬가지다. 해외유학파들은 일찍이 화려한 문단 앞자리를 장식했지만 그는 정작 70세 가까이 되어 어떤 문학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독자들로부터 월계관을 받은 셈이다. 오랜 세월 더불어 지낸 밤의 선물이다.
황현산은 최근 트위터에 유머 시리즈와 무협지 이야기를 올렸다. 그가 ‘난다 긴다’ 하는 여성 트위터리안들이 모두 소녀시절 ‘빨강머리 앤’을 읽었다는 사실을 놀라워하면서 자신은 고교시절 무협지를 쌓아 놓고 읽었노라고 썼다. 일찍이 한국 문단의 특정 ‘문파’에 편입되지 않았던 그는 “강호에 나가 활약하지는 않지만 은거한 곳에 인재가 찾아오면 한마디 충고할 수 있는 처지는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암 투병의 곤고함을 스스로 이기기 위한 농담들이냐고 물었다.
“원래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낙천주의자입니다. 여기가 끝이라면, 여기까지 왔다는 비석 하나는 세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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