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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사과인듯 사과 아닌듯한 北 지뢰유감 표명… 더 솔직할 순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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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8-30 21:55:29 수정 : 2015-08-30 21:5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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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유감(遺憾)’의 설문해자 사전은 유감(遺憾)을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이라고 새긴다. ‘사과(謝過)’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한자의 대표 훈(訓·뜻)과 음(音)은 ‘남길 유’와 ‘섭섭할 감’이다. ‘섭섭함이 남았다’는 식으로, ‘미안하다’보다는 좀 덜 미안해하는 표현으로 이해되는 까닭이겠다.

유감이라 쓰고는 ‘사과의 뜻이니 대충 그렇게 알아듣게나’하는 식의 우격다짐 어법 때문에 황당할 때가 있다. 대개 정치인들이 그리 쓴다. 몰염치(沒廉恥)의 화신(化身)과도 같은 일본 일부 정치인들이 자기(선조)들 못난 짓 감추고자 하는 말에도 유감은 ‘약방에 감초(甘草)’ 격이다. 이 말 ‘유감’에 대해서 우리 언중(言衆)들의 마음에 유감이 깔려 있는 이유일까?

북한의 도발로 젊은이들이 또 상했다. 이제는 이런 꼴 안 보고 살면 좋겠다. 북한은 ‘유감’을 표명했다.
‘사과로 볼 수 있느냐?’ ‘왜 사과했다고 발표했느냐?’ 등 북한이 표명한 ‘유감’을 두고 말들이 많다. 돌아가자마자 사건의 발단이 남한의 조작이라는 투의 발언을 내놓은 황병서 발언도 그런 말들을 부추긴다.

뉘앙스만을 따지며 축자적(逐字的)으로 풀자면 자칫 판을 깨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크게 봐야 한다’며 당국이 ‘해석’을 돕고 나섰다. 외교에 쓰는 정치공학적 용어 아니냐, 사전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정치학자들도 설명한다. 경청해야 할 논리다. 다음의 행동들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니, ‘사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저들의 해석은 상관 말고.

문제는 이런 정치공학적 용어로서의 유감이 실생활의 마당으로, 일상생활의 언어로 스멀스멀 끼어드는 현상이다. 이 말을 ‘잘못했다’ ‘미안하다’ ‘용서하라’란 뜻의 세련된 표현인 양 쓰는 이들이 생겨난다. 얼굴 좀 두꺼운 이들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제 잘못을 마지못해 인정하며 들먹이는 단어로 오용되는 사례다.

이런 곡절(曲折)도 알지 못한 채 ‘유감’을 ‘미안’의 동의어로 알고 쓰는 이도 여럿 있으리라. 얼른 바루어야 할 오염(汚染)된 말의 한 본보기다. ‘부덕(不德)의 소치(所致)’라는 말도 그렇고, ‘불찰(不察)’의 오남용도 그 비슷한 현상이다.

‘내 덕이 부족해 생겨난 일’이 부덕의 소치다. 옛날, 심한 가뭄에 임금님이 기우제를 지내거나 할 때 하셨을 법한 매우 정치적인 말씀이다. 공직자 되려고 청문회에 나선 이들이 논문표절이나 위장전입을 추궁 받을 때 눈 하나 깜짝 않고 ‘내 부덕의 소치’라고 둘러대는 것을 본다. 신문과 방송도 다 그 말 따라 쓴다. 이 ‘봉숭아학당’이 결국에는 교과서가 된다.

‘잘못 했습니다’라고 해야 할 녀석이 ‘살피지 못했습니다’라고 한다면 뻔질거린다고 필시 매 몇 대 더 맞는다. 불찰(不察)의 뜻이다. 축구선수도 연예인도, 인기 미용사도 제 ‘죄’ 고백하는 자리에서 ‘제 불찰입니다’ 쪽지 읽고 그 말은 그대로 언론에 오른다. 제 뜻 대신 ‘대충 미안하다는 얘기’의 뜻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정치공학적 용어’로 유감이란 말을 해석해야 한다는 설명도 있다. 같은 말이라도 원래의 말뜻과 전문용어 또는 학술어는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사진은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양측이 악수하는 모습.
그렇게 쓸 말이 아닌 것이다. 찰(察)은 ‘집(면?)에서 지내는 제사(제祭)’에서 왔다. 祭는 고기 육(肉), 손 우(又), 보일 시(示)의 합체, 고기를 손에 들어 (신에게) 보이는 것이 제사다. 제수(祭需)도, 제단과 조상 신 오시는 길목도 깨끗한지 살펴야 한다. ‘살핀다’ 뜻이 된 유래다. 그림 보듯, 시(詩) 읽듯 하면 직관(直觀)의 문자 한자가 이렇게 문득 보인다.

하긴, 그만큼 행세하는 이들쯤 되면 무슨 말인들 못할까. 솔직하지도 않고, 다만 비겁한 어법이다. ‘큰 일 하시는 이들’이니 하며 한풀 접어 줘야 한다고들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나 듣는 사람을 바보로 알고 하는 (듯한) 이 말투가 마음에 내내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말과 글의 원래 뜻을 모르게 된 현대 사회가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인가. 사전 한번 찾지 않고도 너끈히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나라는 무모(無謀)하다. 창조는 도대체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 공부는 원래 말의 뜻을 새기는 바가 아니었던가?

‘…검게 물든 입술/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숱한 가식 속에서/ 오늘은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 … 부러져버린 너의 그런 날개로 너는 얼마나 날아갈 수 있다 생각하나/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네…’

서태지와 아이들이 ‘시대유감’이라는 노래에서 편 담론이다. 기성세대를 향한 삿대질, 시대가 못내 섭섭했겠지. 단순호치(丹脣皓齒), 붉은 입술이 머금은 흰 치아가 미인의 본디 모습이다. 정직하지 못한 검은 입술, 20년 전 서태지가 들어 보인 상징의 깃발은 아직도 펄럭인다.

순응(順應)하는 것이 청춘이라면 우리 세상은 참 우울하다. 오늘에 와서 그가 다시 그리운 이유다. ‘서태지’만큼 큰 정치를 우리는 가져본 적이 있는가. ‘지뢰유감’도 ‘시대유감’처럼 세상을 멋지게 흔들면 좋으리. 마침내 ‘새로운 세상’ 통일을 맞을 수 있어야 하리.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사족(蛇足)

대개 이 말 ‘유감’은 사전 풀이대로 사과나 미안보다 강도(强度)가 약한 말로 여긴다. 또는 말글의 역사 속에서 그런 식으로 이해하자고 (암암리에) 약속한 것 같은 말이다. 이 말을 한자 단어의 뜻이나 어원학적으로 풀면 이런 개념이 뒤집힐 정도로 힘이 센 말이 될 수 있다.

남길 유(遺)자의 옛글자. ‘가다’는 뜻과 ‘보내다’는 뜻이 합쳐진 것으로 푼다.
남기다 끼치다 버리다 잊다 잃다 등의 다양한 뜻에 동원되는 유(遺)는, 두 손에 삼태기를 들고 땅에서 뭔가 건져내는 것과 이를 어디론가 옮기는 모양을 한 장면으로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이 지닌 이미지가 중심이 되어 가까운(비슷한) 다른 뜻으로도 전용(轉用)된다. 남겨진 재산 유산(遺産)도 있지만 내다 버린다는 유기(遺棄)도 있다. 감(憾)은 마음 심(心·?)과 느낄 감(感)의 합체다. 마음은 느끼는 것의 주체다. 느끼는 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두 단어를 합친 것이다. 문자학은 ‘한스러운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말이라고 해석한다. 단지 ‘마음에 흡족하지 못한 섭섭함’ 정도에서 그치는 단어가 아닌 것이다. 감에(憾?)는 원한 품고 화내는 것이다.

이 말들이 유감(遺憾)을 이뤘다. 원래 문자(한자)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독립된 단어다. 유감은 두 단어가 만나 숙어적으로 쓰인 말이다. 말이 익어 익은 말 숙어(熟語)가 되고, 그 숙어가 익어 단어처럼 쓰인다. 사전을 늘 가까이 해야 할 필요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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