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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야말로 걸어 다니는 숨 쉬는 책”

입력 : 2015-08-20 20:52:21 수정 : 2015-08-21 03:3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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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시집 ‘집에 가자’ 낸 김해자 시인

“인천항에서 낯선 이 포구까지/ 오는 데 수십 일이 걸린 데다/ 그 사이 몸은 다 식고/ 손톱도 다 닳아졌으니/ 삼도천이나 건넜을까 몰라/ 구조된 것은 이름, 이름들뿐/ 네 누운 이곳에/ 네 목소리는 없구나/ 집에 가자 이제/ 집에 가자”(‘피에타’)

두말할 것 없다. 집에 가자! 이 외마디만큼 ‘세월호’의 분노와 고통과 설움을 더 잘 응축할 말이 있을까. 집에 가자, 이제 집에 가자. 김해자(54)의 이 시편은 올 봄 광화문에서 종이꽃처럼 뿌려져 많은 이들을 적신 시편이다. 인천항에서 출발해 하루저녁만 지나면 제주에 닿았을 그 ‘몸’이 낯선 진도 앞바다 포구까지 오는 데 수십일 걸린 데다 차갑게 식고 손톱까지 닳아졌으니, 몸은 왔지만 집에 갈 너는 없구나. 짧은 시편이지만 깊은 울음소리 들린다. 시인은 무릇 남의 슬픔을 대신 울어주는 곡비(哭婢) 같은 존재인가. 김해자 시인은 8년 만에 묶어낸 시집 ‘집에 가자’(삶창)에서 시로 웅변한다.

“봄여름가을 집도 없이 짚으로 이엉 엮은/ 초분 옆에 살던 버버리, 말이라곤 어버버버버밖에 모르던 그 여자는/ 동네 초상이 나면 귀신같이 알고 와서 곡했네/ 옷 한 벌 얻어 입고 때 되면 밥 얻어먹고 내내 울었네/ …살아서 죽음과 포개진 그 여잔 꽃 바치러 왔네 세상에/ 노래하러 왔네 맞으러 왔네 대신 울어주러 왔네/ 어느 해 흰 눈 속에 파묻힌”(‘버버리 곡꾼’)

올봄 천안 근교 농촌 마을로 옮겨 간 김해자 시인. 그는 “어쩌면 지난 1년간 일필휘지한 시들은 억울한 망자와 대화한 것을 받아 쓴 것인지도 모르겠다”며 “이 시대 고통을 과장할 필요는 없겠으나 내겐 분명히 절박하게 들리는 소리들이었다”고 말했다.

점잖은 표준어 ‘곡비’ 대신 김해자의 고향에서는 곡을 하는 꾼, ‘곡꾼’이라고도 불렀던 모양이다. 어버버밖에 모르는 걸인 아낙, 슬픔을 대신 울어주는 그 곡꾼, 어느 해 눈 속에 쓰러져 죽어간 그네야말로 “문자를 넘어선 울음과 곡조로 시를 쓴 진정한 시인”이라고 김해자는 말했다. 아무나 그 경지에 오를 수는 없으나 찰나에나마 그런 높이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 시인들은 너무 높은 자리에서 대접받기를 바라는 면이 크다”면서 “내면의 각별함을 지나치게 과장했을 때 자폐적인 웅얼거림이 심미주의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 쉽다”고 덧붙였다. 김해자는 고려대 국문과를 다니다가 조립공, 시다, 미싱사, 학습지 배달, 학원 강사 등을 전전하며 일찍이 일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시를 써왔다. 전태일문학상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그네의 시에는 생생한 생활 전선에서 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눅진하게 배어 있다.

“이상하기도 하죠 스무 해 전에 도망쳐 왔는데/ 아직도 내가 거기에 있다니/ 내가 떠나온 그곳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니요/ 푸른 작업복에 떨어지는 핏방울/ 아직도 머리채 잡혀 끌려가고 있다니/앞으로 달려온 줄만 알았는데/ 제자리에 선 뜀박질이었다니요”(‘어진내에 두고 온 나’)

오래전 떠나온 일터인데도 여전히 그때와 다름없는 현장을 두고 ‘제자리에 선 뜀박질’이었다 자탄한다. 기본급 인상을 요구하다가 가슴과 배를 AK-47 소총으로 관통당한 캄보디아 소년 이야기에서는 “내가 추우면 누군가의 등이 그만큼 따듯해질 줄 알았던/ 내가 배고프면 누군가 조금은 채워지는 줄 믿었던/ 자고나면 물 잔에 얼음이 얼어있던 밤들이 가고/ 가난한 희망 먹고 배불렀던 어제의 내가 지고/ 오늘 내 손에 메이드 인 캄보디아/ 5천 원짜리 몸뻬 두 벌이 들려 있다”(‘이사’)고 운다. 그 시절 ‘나’가 지금 그곳으로 그대로 ‘이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성찰이 뼈아프다.

인천과 서울에서 20여년 살다가 전주에 내려가 농사를 짓던 그네는 올봄 천안 광덕면 마당 넓은 집으로 옮겨왔다.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대수술을 거쳐 회복한 그는 마당에 일군 생명들과 씨름하면서 다양한 교육 현장에서 사람들과 만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이 시집에 등장하는 사람들 이야기는 대부분 실화”라면서 “사람이야말로 걸어다니는 숨쉬는 책”이라고 말했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강형철 숭의여대 교수는 “김해자의 시들은 대상과의 경계를 허물고 풍경과 사유가 하나가 되는 빛나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면서 “최근 우리 시들이 돌파하지 못했던 자리를 확보한 드문 시집”이라고 평가했다. 김해자는 이번 시집 첫머리에 “니가 좋으면 나도 좋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썼다.

“가끔 찾아와 물들이는 말이 있다/ 두레박 만난 우물처럼 빙그레 퍼져나가는 말/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말한 게 다인 말/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말/ 나만 얻어먹고 되돌려주지 못한/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붉은 돌에 오소록 새겨진”(‘니가 좋아’)

천안=글·사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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