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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中南美와 사랑에 빠진 로맨티스트… ‘파타고니아 양치기 시인’

입력 : 2015-08-03 22:07:08 수정 : 2015-08-04 14: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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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장편소설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 펴낸 구광렬 울산대 교수 “하늘은 커다란 유방을 팜파에 물리고, 무지갯빛 젖은 또옥, 똑 떨어져 양, 말, 나무는 목덜미를 젖혀 양수를, 수액을… 하지만 나무의 뿌리가 땅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수유를 마친 하늘이 새끼들을 데불고 오르는 밤 양, 말, 소들은 밤새 하늘을 휘젓는 ‘늙은이의 수염’ 아래 잠이 듭니다.”

하늘이 대지에 젖을 물리고 양과 말과 나무들에게 양수와 수액을 수유하는 풍경. 스페인어와 한국어로 시를 쓰는 ‘바이링구얼(Bilingual)’ 시인 구광렬(59·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의 ‘파타고니아에선’이란 시편 중 일부인데, 파블로 네루다를 닮은 낭만적 에너지가 벅차다. 청소년기부터 파타고니아에 가서 양을 치는 목동으로 사는 게 소원이었다는 그이였기에 오래 농축하고 발효시킨 문향은 강렬할 수밖에 없다.

1980년대 청춘기를 멕시코에서 보낸 구광렬 시인. 그 시절 멕시코 감옥 체험을 바탕으로 사파티스타 반군 투쟁을 장편소설에 담아낸 그는 “소설 한 편 썼다고 시대의 빚이 탕감되지는 않겠지만 후련한 감은 있다”고 후기에 썼다.
울산에 내려가 그를 만났다. 그가 최근 펴낸 장편소설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새움)가 계기였지만, 중남미 정서로 충만한 그를 진작에 만나보고 싶었다. 그는 20대 중반에 멕시코로 건너가 멕시코국립대학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옥타비오 파스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시절 스페인어로 시를 써 현지에서 여러 문학상까지 받았다. 스페인어 시집만 7권이 넘는다. 한국에서도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한 이래 ‘불맛’ ‘슬프다 할 뻔했다’ 등 5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장편소설도 이번 작품까지 합치면 3편에 이른다.

“어린시절부터 동물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마당 넓은 집에 살았는데 병아리, 강아지, 고양이에서부터 심지어 매도 키웠어요.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사다가 큰 닭으로 키워내기가 쉽지 않은데 성공률이 반이 넘었지요.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 나가면 병아리와 닭들이 줄을 지어 따라다니며 모이를 달라고 뒤꿈치를 쪼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 김찬삼의 세계여행기에서 남미의 파타고니아를 접한 뒤부터는 그곳에서 가서 양을 치는 게 꿈이 되었습니다.”

대구에서 나고 자라 그 지역 명문고로 소문난 경북고에 다녔는데, 대부분 법대나 의대를 지망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파타고니아 목동을 꿈꾸었으니 엉뚱하달 수밖에 없다. 모친은 의대를 강력히 희망했지만 ‘다행히’ 신체검사 결과 적록색약이 밝혀져 문과로 갔고, 한국외대 스페인어과에 입학했다가 군대를 다녀온 뒤 멕시코국립대학 3학년으로 편입하면서 오래된 꿈의 첫 단추를 꿰기 시작했다. 박사과정을 앞두고 스페인어로 쓴 시를 지도교수에게 보여주었더니 그가 주관하는 문예지 ‘엘 푼도’에 실어 호평을 받기 시작한 이래 지금은 멕시코는 물론 우루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 등 중남미 문단에서 시 청탁이 꾸준히 이어지는 시인으로 살고 있다.

아르헨티나 FM방송 시 소개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던 그의 시 ‘야생의 꽃’은 우루과이 작곡가 겸 가수 레오나르도 피게라가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그가 멕시코에 거주한 기간은 1982년부터 1990년까지 8년 남짓하다. 7년 만에 학업을 끝내고 서울대에서 잠시 강의를 했지만 ‘자유를 맛본 이의 구속’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멕시코로 갔다가, 목숨을 끊겠다는 협박까지 불사하는 모친의 종용으로 귀국해 울산대 교수로 정착했다. 정착이라곤 하지만 방학이면 남미로 날아가 정서적으로는 ‘갈라진’ 삶을 25년 가까이 살아왔다.

“한국은 스트레스 지수로 치면 세계 최고일 겁니다. 남미는 그 대척점에 있습니다. 나는 사실 중남미에 가면 긴장을 안 해요. 이곳에서는 사람을 만나면 늘 긴장하는 편인데 그곳에서는 사람이 나무나 돌, 동물처럼 느껴져 편안합니다. 그들에게는 서로 다른 것이 원칙이고, 우리는 같은 것 혹은 같아야 한다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지는 사람들이니 극과 극인 셈이지요. 혼혈이 정체성인 그곳 문화에서는 내가 그들과 다른 걸 인정하고 깊이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콜럼버스가 그들의 대륙을 탐하기 시작한 이래 3000만명 넘게 학살됐다고 한다. 히틀러가 죽인 유대인 1000만명의 3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정복자들은 사해동포주의, 혹은 가톨릭 전파를 앞세워 피를 섞기 시작해 쌍둥이 자매조차 흑인과 백인으로 나뉠 정도로 다양한 피부와 종으로 뒤섞인 것이 현실이다. 그들에게 서로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문화이고 이런 문화와 인종의 용광로야말로 남미문학의 중요한 배경이다. 이번에 구광렬이 펴낸 장편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는 남미의 역사적 맥락과 멕시코의 부조리한 현실을 배경으로 한국인 ‘강경준’이라는 인물이 겪은 이야기를 담았다.

“남미를 오가며 살아온 지 30여년이 흘렀지만 끈질긴 청탁에도 불구하고 산문이나 칼럼은 한 번도 쓰지 않았습니다. 잡문이 아니라 시나 소설로 써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지요. 이번 소설에 담아낸 ‘죽음을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사는 남자 이야기는 제 청춘이 투영된 흔적이기도 합니다.”

멕시코에 유학 온 강경준은 중고차를 잘못 거래했다가 구속돼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나우칼판 감옥에 수감된다. 변호사는 돈만 떼어먹고 달아나고 5년 형을 선고받아 수감생활을 하면서 마약조직과 관련된 수감자들을 만나고, 지진이 일어난 틈에 탈출했다가 멕시코 반군 사파티스타의 거점인 치아파스에 들어가 저격수로 복무하다 재수감돼 99년을 언도받은 청춘의 이야기가 숨가쁘게 펼쳐진다. 실제로 중고차를 잘못 팔아 수감됐다가 한 달 만에 운 좋게 풀려난 체험과 원주민들과 2년간 함께 거주하며 목동으로 살았던 경험들이 생생하게 반영된 이야기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의 목숨을 대신 받아 살아가는 마야 첼탈 족 전설을 모티프 삼아 ‘죽음이 마려운’ 남자의 장렬한 투쟁과 삶을 부정부패로 얼룩진 멕시코 현실을 배경으로 치밀하게 직조한 작품이다. 애초 스페인어로 써서 멕시코 에온 출판사에서 간행하려다 막판에 좌절됐는데 원고마저 바이러스로 파괴된 것을 한국어로 되살린 것이다.

“체 게바라는 햄릿형 돈키호테였습니다. 무모한 듯 보이지만 치밀했고 치밀하지만 시적 감흥으로 넘친, 동물을 사랑하는 애틋한 사람이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나도 햄릿에 가까운 돈키호테일 겁니다. 세상과 사람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소심한 보통사람인데, 돈키호테처럼 보이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남미의 직업혁명가 체 게바라가 죽을 때 배낭에 남긴 필사 시들을 분석해 국내에서 책을 펴내기도 했던 구광렬은 게바라야말로 감수성이 풍부한 햄릿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도 승합차 지붕에 텐트를 싣고 다니며 동해 바다나 산 밑으로 가 별빛 아래 뒤척이며 시와 소설을 쓴다고 했다. 문수산 아래 마당 넓은 집을 지어놓고 원숭이도 13마리나 키우다가 죽은 녀석이 안타까워 모두 떠나보냈다. 남미의 성스러운 ‘목소리’ 메르세데스 소사의 죽음을 접했을 때는 울다가 이렇게 썼다.

‘사람의 목구멍이/ 골짜기란 걸 알았습니다/ 물이 흐르고 새가 지저귀고/ 꽃이 피는// 사람의 목소리가/ 바람이란 걸 알았습니다/ 물소리, 새소리, 꽃향기를/ 코, 귀에까지 실어다주는(‘메르세데스 소사’)

울산=글·사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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