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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의 두 巨人, 속내를 들여다보다

입력 : 2015-08-01 02:22:31 수정 : 2015-08-01 02: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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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 평전’ 통념 깨고 다른 접근 시도
단합하지 못한 당시 지도자들의 단면 보여줘
좌우익합작의 실패 한계성도 세세하게 짚어
김삼웅 지음/채륜/1만9000원
몽양 여운형 평전-진보적 민족주의자/김삼웅 지음/채륜/1만9000원


8·15 광복절을 앞두고 당시 열혈 독립지사의 평전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몽양 여운형 평전’을 내고 통념과는 다른 접근을 시도했다. 요동치는 해방정국에서 좌우익 이념의 틀을 깨고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주문한다. 우선 몽양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극단적이다. 투철한 민족주의자, 진보적 사회주의자, 회색 기회주의자 등의 평판으로 나뉜다. 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라지만, 이는 단합하지 못한 당시 정치지도자들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몽양만큼 이념의 굴레에 갇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인물도 드물다고 주장한다.

몽양이 전국적인 인물로 알려진 계기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였다. 몽양이 중심이 된 건준은 해방 직후 첫 민간 정치조직이었다. 훗날 좌익 운동가들이 건준의 다수를 점령하는 바람에 본래의 창립 목적은 훼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독립지사들이 대부분 해외에 머무른 한계상황에서 건준의 활동은 평가받아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일제 항복 직후 조선총독부는 건준에 정국 안정과 치안을 맡겼다. 그들의 안전한 일본 철수에 대한 담보였다. 건준의 활동 가운데 이런 것도 있다. 전국 교도소 구치소에 갇혀 있는 민족 인사들과 독립운동가들을 석방한 것이다. 당시 몽양으로 인해 감옥에서 해방되거나 목숨을 건진 인사들은 줄잡아 2만여명. 건준은 불과 보름여 짧은 기간 활동한다. 하지만 몽양의 거침없는 행보는 국내 친일인사들과 총독부 내 한국 관료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전전긍긍하던 총독부 관리들은 도쿄에 주둔 중인 미극동군사령관 맥아더에게 허위보고서를 냈다. 건준 내부의 좌익분자들의 행태 등이 과장 묘사되었고 이른바 ‘빨갱이’ 폭동의 중심에 몽양이 있다는 것 등이었다. 이는 당시 소련공산당의 동아시아 적화야욕를 예의 주시하던 보수파 맥아더 등을 자극했다. 몽양이 미 점령군으로부터 냉대받는 결정적인 빌미가 됐다.

당시 소련과 미국 등은 한반도 분단을 결정하는 중요한 회담을 연달아 열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운동가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내면서 사분오열됐다. 김구를 중심한 충칭의 임시정부, 이동휘 등의 고려공산당, 이승만의 하와이 독립인사 등은 저마다 갈가리 찢어져 제목소리 내기에 바빴다.

한반도의 운명을 쥔 미국은 이승만을 가장 믿을 만한 세력으로 지원했다. 미국이 그를 믿었던 이유는 국제적 감각이 누구보다도 뛰어났고 소련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김구 역시 임시정부 내 좌익인사들의 행태에 염증을 낸 나머지 좌익과 결별했다. 그러나 몽양은 그러지 않았다. 건준을 주도하면서 민족주의 세력과 좌익인사들을 모두 포괄했다. 좌익 세력을 껴안은 이유는 스스로 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탓이기도 했지만, 민족 대동단결이 몽양의 최종목표였기 때문이다.

몽양이 가장 힘썼던 것은 좌우 합작이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 미 24군단 병력 10여만명이 인천항을 통해 진주하면서 몽양은 궁지에 몰렸다. 미군은 건준을 빨갱이 폭동집단으로 몰아붙였고, 몽양을 변호해 줄 지지세력은 거의 없었다.

저자 김상웅은 “몽양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온전한 자주 정부를 만들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 민족세력을 하나로 묶지 못한 것은 몽양의 한계”라면서 “민족 정통세력이 단결하지 못하는 실상은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지 않고 있나 싶다”고 했다.

이덕희 지음/북앤피플/2만원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교양총서/이덕희 지음/북앤피플/2만원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은 국내에 알려져 있지 않은 이승만의 하와이 활동을 소개한 책이다. 주로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할 당시의 얘기다. 이승만은 그의 일지에 미국에서 얼마 동안 살았는지를 적어 놓았다. 그는 “1904년 11월4일 고국을 떠나 1940년 12월3일까지 36년간을 미국(하와이) 땅에 머무르며 고국 해방을 기원한 한 많은 이방인”이라고 기록했다.

하와이에서 갈고닦은 노하우는 새로 세워진 대한민국의 체제에 그대로 적용된다. 초대 대통령 취임 직후 추진한 의무교육, 농지개혁 등은 하와이 시절의 연장선이었다.

저자는 “이승만은 이미 일제 패망을 예견하고 미국과 교류하면서 건국을 준비한 인물이었다”면서 “그러나 대통령 취임 이후의 정치적 폐단이 국부로서의 존재감을 흐리게 만들었다”고 풀이했다.

북진통일의 이승만과 맥아더의 대공산당 주전론은 죽이 맞았다. 이승만은 미국은 결코 한반도를 버릴 수 없을 것이란 확고한 판단 아래, 만주 폭격을 주장한 맥아더를 지지했다. 만일 남하하는 중국군을 저지하기 위해 만주 폭격을 단행했다면 한반도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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