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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나무와 물이 있었기에… 이렇게나마 겨우 늙었다”

입력 : 2015-07-30 20:54:11 수정 : 2015-07-30 20:5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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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남준 등단 30년 넘기며 신작시집 중독자 펴내 경남 하동군 악양면 동매길 지리산 자락에 홀로 사는 박남준(58) 시인이 등단 30년을 넘기면서 이를 기념하는 신작 시집 ‘중독자’(펄북스)를 펴냈다. 자연 속에서 시를 ‘살아내는’ 시인으로도 호가 높은 그이의 일곱 번째 시집에서는 꽃과 새와 물 같은 대상을 관찰하는 시선에서 더 나아가 그것들과 일체가 되는 경지를 자주 보여준다. 그것은 시인이 바라는 ‘관음(觀音)’의 상태이기도 하다.

“하루해가 뉘엿거린다/ 깜박깜박 별빛만이 아니다/ 어딘가 아주 멀리 두고 온 정신머리가 있을 것인데/ 그래 바람이 왔구나 처마 끝 풍경소리/ 이쯤 되면 나는 관음으로 고요해져야 하는데/ 귀뚫어라 귀뚜라미 뜰 앞에 개울물 소리/ 가만있자 마음은 어디까지 흘러갔나”(‘마루에 앉아 하루를 관음하네’)

악양 토담집 마루에 앉아 하루 내내 구름과 꽃과 개울물을 보며 매미와 나비와 별빛까지 아우르는 일상이 담긴 시편이다.

자연이 보여주는 위로의 풍경 속에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보면 해탈의 경지까지 갈 법도 하지만, 마음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어디쯤 가 있는지 종잡기 쉽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리하여 봄날의 아지랑이를 보면서도 “어쩌면 치미는 슬픔 같은” 느낌도 들고 “이렇게나마 겨우 늙었다”는 한숨 같은 안도도 한다. 시인은 “가슴에 병을 얻은 쯤이야/ 인생은 이미 덤이었다며 애써 무심”하려고 하고 “생의 지도에 점을 찍을 점정의 아침이/ 그의 숨 끝에 일어나고 흘러간다”고 짐짓 초연하고자 한다. 이 같은 다짐은 그의 주변을 둘러싼 생명들의 싱싱하고 질긴 힘에 힘입은 바 크다.

“똥거름을 내고 호박씨 심었다/ 호박과 함께 토마토 올라왔다/ 그러니까 작년에 먹은 토마토가/ 으르릉 그르릉 이빨 사이를 요리저리/ 위장과 창자를 거쳐/ 한마디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거시기를 통해 빠져나왔다는 것인데/ 호박을 키우기 위해 뽑아내던 토마토 어린 것들/ 두어 개 남겨놓는다”(‘강력한 토마토’)

똥거름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생명력이라니. 이처럼 강력한 토마토의 의지 앞에서 인간의 근심 따위야 한갓 초라한 사치로 전락할 지경이다. 시인의 세상에서는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도 예사롭지 않다. 도라지꽃이 출렁거리고 구절초꽃이 휘청거릴 때 시인은 “꽃 체중계들 바늘 끝이 간지럽다고 몸살을 친다”고 썼다. 가볍다고 무겁지 않은 건 아니다. ‘물레나물꽃등’에서는 “햇살을 담아 꽃잎물레에 돌리는” 바람개비와 “곁을 떠난 사랑 돌아오는 길/ 허방을 짚을까 봐/ 까치발을 들고 켜 든 산비탈/ 샛노랗게 불 밝힌 꽃다발 전등”도 본다. 이런 노래는 어떤가.
경남 하동군 악양면 지리산 자락 토담집에 홀로 사는 박남준 시인. 박 시인은 “이 참혹한 시대에 30년이나 시를 쓰면서 살아왔다니 진땀이 난다”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언어를 마음 가는 대로 부려도 크게 부끄럽지는 않겠다는 믿음이 생겨 다행”이라고 말했다.

“저/ 함박눈/ 산/ 너머로부터 달려온/ 당신이 띄운 편지라는/ 걸/ 안다 맑고 따뜻한 눈물로/ 쓴/ 곱은 손가락 호∼ 불며 써내려/ 간/ 흰 겨울편지”(‘내 손등에 떨어지는 그대의’)

손등에 떨어지는 함박눈, 그대의 흰 겨울편지, 산 너머로부터 달려온 맑고 따뜻한, 눈물로 쓴 편지, 당신이 띄운 편지. 단순 소박하지만 함박눈의 포근한 느낌으로 가슴을 쓸어주는 유행가 같은 절창이다. 아무나 절절한 유행가를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시인의 시선은 주로 자연에 머물지만 사람살이의 풍경도 떠나지 않는다.

트럭 행상이 외치는 “홀애비 사세요 홀애비” 소리에 홀린 이야기는 익살스럽고, 가난한 시인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한사코 콩나물국밥값을 받지 않겠다던 전주 남부시장 장뻘국밥집 아주머니 이야기는 애잔하다. 그 아주머니, 암으로 먼저 떠났으니 시인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는 “이건 살인사건이다”고 결연히 목소리를 높였다.

신경림 시인은 이번 시집을 두고 “어쩐지 이미 이 시인은 자연 속에서 자연에 순응해 사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면서 “그래서 이 시집 속의 시들은 봄날 산길을 가다가 만나는 향기 진한 꽃처럼 아름답고, 숲속 깊은 데서 마주치는 오래된 신목(神木)처럼 섬뜩하다”고 상찬했다.

등단 30년을 기념하는 이 신작 시집은 진주문고의 인문출판 브랜드 ‘펄북스’ 첫 책으로 나왔다. 박남준은 “지역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의 몫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시집을 내는 이들에게 왜 지역에 있는 출판사에서 책을 냈느냐고 책망을 했던 낯 뜨거운 말빚을 갚기 위해, 이 참혹한 시대에 지역에서 인문학 출판사를 하겠다는 청맹과니 같은 소리를 하는 서점 주인에게 원고를 넘겼다”고 ‘시인의 말’에 썼다.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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