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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북한산 비석 비밀 푼 김정희… 금석학자 최고 반열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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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7-26 20:31:23 수정 : 2015-07-26 20: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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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학(金石學)과 김정희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한석봉으로 알려진 한호(韓濩·1543∼1605)와 쌍벽(雙璧)을 이룬 조선의 명필이다. 중국까지도 소문난 독보적인 필체 ‘추사체(秋史體)’로 오똑하다. 수많은 작품 중 ‘茗禪’(명선) 두 글자를 쓴 작품은 특히 사랑받는다.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명(茗)은 차나무의 싹이란 뜻으로 차를 가리킨다. 선(禪)은 마음을 가다듬고 진리를 찾는 불교의 수행법, 명선은 차를 마시는 것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는 것을 합친 그윽한 말이다. 
추사의 대표작 ‘茗禪’(명선).

제주도 유배시절의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는 절제와 여백의 아름다움 속에 어려움에 처한 선비의 비장함을 담은 그림으로 오래 감동을 주어왔다. 또 하나의 대표작이다. 완당은 추사와 같은 그의 호(號) 중 하나다. 당당한 화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유(許維)의 스승으로, 또 후원자로 큰 몫을 했다. 소치는 진도의 대표적인 화맥 운림산방(雲林山房)의 창시자다. 아들 미산(米山) 허형(許灐)과 손자 남농(南農) 허건(許楗)의 3대와 손자뻘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등이 이룬 한국화의 명문 가계(家系)가 운림산방이다.

우리 차(茶) 역사에서 중요한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草衣禪師)와 차를 매개(媒介)로 40여년 나눈 우정이 또한 우리 차 문화의 특별한 장(章)이다. 대표작 ‘명선’은 제주도로 귀양 갔을 때 초의가 보내준 좋은 차에 감사하며 쓴 글씨다. 그러고 보니 차 전문가, 즉 다인(茶人)일세. 학자로도 그렇지만, 다인으로서의 그의 이름도 중국에까지 정평이 났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의 초상화.

학자가 관리(官吏), 즉 공무원이었던 그 시절, 그의 벼슬은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대학교 총장 자리다. 학자 관리 화가 서예가 다인 등 그의 직함(職銜)은 다양하다. 그 위에 금석학자(金石學者) 이름이 더 붙는다. 게다가 ‘조선 최고’의 금석학자라 한다. 우리나라 금석학의 태두(泰斗)라고도 한다. 태두는 한 분야의 큰 권위자라는 비유적인 말.

도무지 그의 본디가 무엇인지 헷갈린다. 전형적인 천재의 모습인가? 우리 범부(凡夫)들 질투심 품을 만하지 않는가? 다른 이름들은 글자의 뜻으로 대개 풀이가 된다. 그런데 이 금석학이라는 제목은 좀 낯설다. 뭐지?
추사가 최초로 판독해 그 실체를 밝혀낸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국보 제3호다.

1817년 7월 추사가 국보인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를 판독(判讀)했다. 바래고 닳은 표면에 이끼까지 피어 있었던 그 비석에서 역사의 더께를 털어낸 것이다. 그때까지 글자가 없는 무자비(無字碑) 또는 몰자비(沒字碑)라고도 했고, 무학대사의 왕심비(枉尋碑)라고도 했다. 요즘 사람들 말로 ‘극강 금석학자’ 스타 김정희의 깃발을 올린 쾌거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 진흥왕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인 555년 북한산 등을 순행(巡行)했다. 이때 ‘이 땅은 신라 강토(疆土)이노라’라고 비석들을 세웠다. 자연석에 지금 쓰는 한자체인 해서체(楷書體)로 음각한 글씨는 사료로도 중요하다. 역사 찾기 또는 바로 세우기라고나 할까? 경남 창녕, 함남의 황초령과 마운령 등에서도 이런 순수비가 발견됐다. 이런 돌(석·石)로 된 비석에 새겨진 글이나 여러 표식 또는 비석 자체의 의의는 연구의 대상이 될 만한 주제다. 또 쇠북이라고도 하는 종(鐘)이나 제사용 솥(정·鼎), 금속 생활용기 등 쇠붙이(금·金)에 새겨진 글씨, 즉 종정문의 뜻을 궁리하는 것도 한가지다. 이 부문 연구가 ‘금석학’이다. 추사는 중국에서 이 학문을 배워 이 땅에 옮겨 심었다.

금석학은 갑골학(甲骨學)의 다음이라야 맞다. 갑골문은 고대 중국의 신화시기와 역사시기에 걸쳐 있던 하(夏), 상(商) 또는 은(殷), 주(周) 시대 중 상나라 때 생겨난 초기 한자다. 사물의 모양을 따서 만들었다. 그러나 갑골문의 유물 유적은 종적을 감췄다가 1899년에야 모습을 드러내 그때부터 비로소 연구가 시작됐다.

황하(黃河) 유역에서 생겨난 갑골문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세련된 디자인으로 변모하고 다양한 뜻을 담게 됐다. 한자 역사 3500년 동안의 거대한 변화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서로 차이가 나는 여러 모양과 뜻의 한자를 생성해 냈다. 중국의 금석학이 주목하는 대목이다.

쇠와 돌에 새겨진 글자의 모양은 웬만하면 변하지 않는다. 그 시기와 지역마다의 다양한 정보를 담아 후세에 보여준다. 역사학과 고고학의 사이에서 금석학이 나름의 학문분야로 성장하도록 한 또렷한 자원이다. 요즘 중요하다고들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추사 학문들 중 중요한 하나인 금석학의 뜻이다.

북한 땅에 있는 점제현신사비. 우리 금석학 연구대상 제1호였다. 일제 때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한국고대문자전’(2011년 10월) 도록 사진이다.
■ 사족(蛇足)


우리 금석학은 낙랑시대의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서기85년)로부터 비롯된다. 평남 용강군에 있는 높이 166㎝의 돌비석이다. 초기 예서체인 고예(古隸)로 적힌 비문의 내용은 산신께 드리는 제사다.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다.

압록강 건너 지금은 중국 땅인 지안(集安)에 있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 신라의 여러 진흥왕순수비 등이 점제현신사비의 꼬리를 문다. 이후 불상 등을 만드는 조상(造像), 절 세우는 조사(造寺), 묘지나 탑을 세우는 묘탑(墓塔) 등의 뜻을 담은 비석들과 종명(鐘銘) 등 많은 금석문이 있다.

조선 영조 이후 실학자들에 의해 금석학이 본격적으로 개척된 것으로 본다. 선조의 왕손인 이우(李俁) 이간(李侃) 형제가 금석학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한다. 정밀한 연구와 고증(考證)의 결과를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이란 저술로 집성한 김정희에 이르러 꽃을 피우게 된다.

선조 때의 차천로, 광해군 때의 김광수, 숙종 때의 이익 안정복, 영조 때의 이희령 유척기, 정조 때의 조인영 홍양호, 순조 때의 정약용 서유구 등이 금석학 분야의 식견이 높았다. 이런 금석학은 역사학의 한 분야로 옛 기록과 구전(口傳)의 설화 등에 의존했던 과거의 역사연구에 상당한 기여를 하며 성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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