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나마스테!] "나는 일류의 아류가 아니라 변방 삼류의 본류입니다"

스토리툰 '싸나희 순정' 펴낸 류근 시인

‘싸나희의 순정엔 미래 따윈 없는 거유. 그냥 순정만 반짝반짝 살아 있으면 그걸로 아름다운 거유. 그런 세계를 몰르니까 세상이 이렇게 팍팍하고 험난한 게 아니겠슈. (…)유씨는 몰러유, 유씨는 아무것도 몰러유. 유씨는 싸나희의 순정을 몰러유.’

유씨란 ‘싸나희 순정’(문학세계)을 펴낸 류근(49) 시인의 분신이고 이 발언을 한 ‘주인집 아저씨’는 이름은 없지만 이 책에서 시종 강렬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공간 배경은 ‘마가리’인데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로 이어지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따왔다. 어느 날 기차를 타고 나타샤도 당나귀도 없이 변방으로 떠나다 차창 너머 피어 있는 도라지꽃을 보고 무작정 내려 정착한 곳을 시인은 ‘마가리’로 설정했다. 이곳에서 세든 주인집 아저씨가 걸물이다. 뽕밭을 일구는 그이는 동화작가 지망생인데 만날 술에 절어 사는 유씨를 타박한다.

‘유씨는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시인이라고 나오던데, 시인이면 민족의 지도자 같은 냥반이라고 내가 일찍이 믿어 온 바가 있고 배워 온 바가 있는데 그렇게 허랑방탕하니 인생을 빨랫줄에 널어 놓고 함부로 살아 버리면 우리 자라나는 어린 민족들이 어디다 마음을 얹고 비비고 개기고….’

그때마다 유씨는 툴툴거리며 무어라 대꾸해보지만 번번이 말문이 막혀 애꿎은 ‘시바’ 소리만 반복한다. 시인이 자신을 ‘을’로 만들어놓고 전개하는 주인집 아저씨 이야기들은 페이스북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2년여 동안 페북에 올렸던 이야기들을 일러스트레이터 퍼엉(puuung)의 그림들과 함께 엮어냈다. 만화라기에는 이야기가 많고 스토리를 부각시키자니 그림의 비중이 만만치 않다. 출판사에서 고심하다 ‘스토리툰’이라고 작명했다는데 서점에서는 소설 코너에 꽂혀 있다.

“일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삼류의 자리는 압니다. 일류는 남들과 소통하지 않겠다는 작전이지만 어떻게든 소통하겠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는 게 삼류지요. 작정하고 그러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전략이 돼버린 겁니다. 일류와 이류 쪽에는 아류들이 많은데 저는 그냥 삼류 본류입니다. 저같이 아무런 이야기나 닥치는 대로 쓸 수 있는 시인도 필요합니다. 변방에는 변방에서 할 이야기들이 많아요.”

시인이 독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열망을 가지는 거 자체가 ‘삼류’라고 류근은 정의했다. 독자들이 자신의 시를 쉬 이해하면 오히려 자존심이 상하는 부류도 있다니 그의 역설적 화법이 이해되지 않는 바 아니다. 그는 ‘싸나희 순정’에서 말했다. ‘머리로 쓴 시를 하필 머리로 읽으니까 머리가 아프지요. 누군가 마음으로 쓴 시를 마음으로 읽으면 마음이 아플 텐데,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나면 세상이 조금 덜 아파질지도 몰라요.’
대관령 삼양목장에서 만난 류근 시인. 그는 “싸나희 순정은 픽션이지만 누구나 이웃에서 만날 수 있는 가슴 속 진실”이라고 말했다.
이해선 제공

류근과 이야기를 나눈 곳은 드라마 ‘가을동화’ 촬영지였던 대관령 삼양목장 ‘은서네 집’이었다. 시인이 ‘고모’를 찾아 그곳에 왔고, 일행은 그 고모를 따라 목장에 갔다. 고모란 사진작가 이해선을 지칭하거니와 류근이 중앙대 문예창작과 시절 수시로 드나들던 학교 앞 카페 ‘동인’의 주인이었다. 매일 강의실처럼 들러 많은 추억을 쌓았던 카페 주인을 문창과 학생들은 모두 ‘고모’라고 불렀다. 고모는 대관령으로 가는 차 안에서 류근이 문창과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술에 취해 겨울 길거리에 쓰러져 동사할 뻔한 에피소드를 전해주었다. 류근의 술 이야기는 이번 책에도 그렇고 페북에서도 중요한 매개로 자주 등장하거니와 ‘술의 세계’를 빼놓고 ‘유씨’를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주인아저씨’ 입을 빌려 “유씨는 말유, 고독이 고이는 시간을 참지 못하구 허구헌 날을 술로 인생을 조지고 있잖유. 그건 예술가의 세계가 아닌 거쥬”라고 스스로 타박하지만 술과 헤어지기는 어렵다.

“맨 정신으로 버티는 게 어려울 때, 불필요한 자의식들이 발동될 때, 온갖 상처들이 튀어나올 때 술을 마셔요. 절대 혼자 마시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워 마십니다.”

첫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인 ‘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년)의 제목처럼 류근은 상처에 유난히 민감한 편이다. 그는 이번 책 서두에 ‘가난과 슬픔의 양 손으로 양육당하던 유년’이라고 썼거니와 가난은 그의 무의식을 점령한 가장 큰 트라우마였던 것 같다.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지 백일 만에 어머니는 어린 자녀들을 끌고 안고 충주로 야반도주했다. 부친은 자신의 집안은 물론 소문난 부자였던 외가까지 거덜내고 헤어진 터였다.

4남2녀 6남매 중 막내였던 류근은 가난에 뼈가 저렸지만 형과 누나들의 사랑만큼은 함뿍 받으며 자랐으니, 가난과 사랑이라는 쓸쓸하고 따스한 질료가 시인의 자양분을 일찌감치 수유한 셈이다. 그 형과 누나들도 집안의 부침에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가 서울에 다시 모였는데, 어린 시인과 손위 누나만 시골에 떨어져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 외로움과 지금 국어교사를 하는 둘째 형이 보내준 삼중당문고판 사랑시집, 박인환을 좋아했던 중학교 시절 여자 국어선생님이 그를 본격적으로 시인을 향해 담금질했다.

서울로 올라와 오산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문예반 생활을 했다. 학교 신문에 ‘동작동’이라는 시를 발표했더니 선배들까지 교실로 찾아와 ‘류근이 누구냐’고 물을 정도로 단박에 스타가 됐고, 교내뿐 아니라 전국 단위 백일장들에서 1등을 석권해 천재로 각광받았다고 했다. 고등학교 연합문예반 시절 술을 배우기 시작해 이미 고교시절 소주 9병 주량까지 넘어섰다는 그이고 보면, 술은 일찍이 뗄 수 없는 친한 벗이었다.

6남매를 반듯하게 키운 건 어머니의 힘이었다. 어머니는 강원도 접경을 넘나들며 행상을 했고 동네 사람들이 모아준 돈으로 다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충주 시내까지 진출해 5층짜리 ‘독일제과’ 주인도 했지만 부침이 심했다. 디제이를 4명이나 거느린 공간도 운영했는데 그 덕분에 류근은 옛 노래들은 다 꿰는 편이며 일찍이 ‘딴따라 정서’에 익숙했다. ‘삼류 트로트 통속 연애 시인’이라고 자처하는 문화적 배경이다. 어머니는 곧고 단정할뿐더러 어디를 가나 인심을 잃지 않는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마지막 요양원에서조차 인기가 많았던 모친은 사람들 앞에서는 의연하지만 ‘돌아서면 피멍드는’ 가슴을 지닌 분이어서 류근 자신도 그런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새삼 이번 책을 톺아보니 호박꽃 된장국이나 비 오는 날 수제비를 배달해준 ‘마마담’에서도 4년 전 작고한 어머니의 그림자가 보인다.

“어른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서적으로는 아직 어머니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시가 없으면 폐인이지요. 시는 산문의 삶을 극복한 경건한 것입니다. 그 경건함에 길들여지면 함부로 허물어지기 힘듭니다. 시가 없으면 나는 죽었습니다.”

양들이 노닐고 풍력 날개가 도는 언덕을 내려와 은서네 집에서 어둠이 짙어질 무렵까지 시인은 더불어 술잔을 기울였다. 말미에는 노래를 불렀다. 그가 작사한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대신, ‘보고 싶은 얼굴’을 떨리는 미성으로 불렀다. 노래 가사는 죽기 전 딱 하나만 더 써서 최백호에게 주고 싶다고 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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