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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꽃잎으로 흩날리는 사랑과 죽음의 ‘변주곡’

입력 : 2015-06-04 20:25:36 수정 : 2015-06-04 20: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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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평재 장편소설 ‘엉겅퀴 칸타타’ 소설과 그림이 만났다. 주객관계는 아니다. 소설과 그림 둘 다 각기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서로 스며든다. 스며들기는 하되 피차 곁을 많이 주지는 않는다. 따로 존재하면서도 조금씩 엉기어 소설과 그림을 넘어선 새로운 경지를 향해 간다. 소설가 이평재(56)가 소설과 그림을 겸업하는 스승 윤후명(69)의 그림 스무 장을 붙들고 써서 펴낸 장편소설 ‘엉겅퀴 칸타타’(폭스코너)가 그 경우다. 소설을 돕는 삽화 형식으로 그림이 수용되는 경우는 있지만 이런 시도는 드물다.

‘천Lee’라는 이름으로 활약해온 세계적인 여성화가 ‘천이’가 소설의 화자다. 이제 겨우 49세, 자연주의자요 채식주의자인 이 여인이 담도암 말기 판정을 받고 무의식과 의식 사이를 부유하며 떠올리는 사랑과 죽음에 관한 몽환적인 이야기다. 그네가 누워 있는 병실로 누군가 엉겅퀴꽃 그림을 보낸다. 엉겅퀴는 천이를 아득한 기억으로 끌어내린다.

스승의 그림과 자신의 이야기를 결합시킨 소설가 이평재. 그는 “그림 속 꽃의 말을, 새의 말을 따라 이 책이 후회 없는 삶을 원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
폭스코너 제공
그네는 임금에게 올리는 장을 담그는 집안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화가를 꿈꾸었지만 가업을 잇기 바라는 할머니 뜻을 어기지 못하고 포기했다. 할머니가 반대하던 결혼 승낙이 그 조건이었다. 고부 간의 갈등이 심할 수밖에. 어머니는 어느 날 작심하고 뒷감당은 자신이 할 테니 꿈을 이루라고 아버지를 떠나보낸다. ‘(아버지는) 촉촉하게 젖어드는 눈가를 계속 손으로 쓸어내리며 엉겅퀴꽃이 피어 있는 들판을 걸어갔다. 아버지는 붉은 엉겅퀴가 피어 있는 들판에 서서 한동안 발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길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기차 폭발사고로 사라졌다. ‘여름이 되어 붉은 엉겅퀴가 피어나면 어머니는 실성한 사람 같았다. 낮에는 멀쩡하게 지내다가 밤이 되면 맨발로 뛰쳐나갔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서 있던 들판을 밤새 헤매고 다녔다. 새벽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의 발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엉겅퀴 그림을 쓰다듬는 천이의 손끝은 가시에 찔려 툭툭 터지는 느낌이다. 손끝에서 흘러나온 피가 하얀 엉겅퀴꽃을 붉게 물들이는 환각에 빠진다. 어머니는 언젠가부터 엉겅퀴를 장 속에 박기 시작했다. 천이는 생각했다. ‘엉겅퀴의 질긴 생명력처럼 어머니도 바닥을 치고 이제 새롭게 살아남기를 시작한 것이라고. 그러니까 엉겅퀴에 아버지를 담아 장 속에 박아 삭힌 뒤 꼭꼭 씹어 삼켜 소화를 시키고 있는 거라고. 머지않아 할머니까지 담아 먹고, 나에게도 먹일 거라고.’

소설과 그림을 겸업하는 윤후명의 ‘엉겅퀴 꽃’ 시리즈.
천이는 사랑했던 남자들도 장 속에 박아 넣는다. ‘케이와의 복잡했던 사랑, 알과의 처절했던 사랑, 피제이와의 단순했던 사랑’들을. 천이는 명백한 죽음을 앞두고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엔 무모한 사랑도, 무모하지 않은 사랑도 없다고. 그저 사랑일 뿐이라고. 반드시 함께 있지 않아도 사랑이 될 수 있고, 함께 붙어 있어도 사랑이 아닐 수 있다고.’

윤후명
어머니로 상징되는 하얀 엉겅퀴와 아버지 같은 붉은 엉겅퀴가 소설 사이사이에 윤후명의 그림으로 등장한다. 햐얀 설산 위로 새가 나는 그림 ‘설산의 새’가 차지한 페이지 옆에 흘러가는 글에서는 천이가 새 속에서 세 개의 사랑을 보는 묘사가 펼쳐진다. 죽음이 임박해오면서 벽에 걸려 있던 하얀 엉겅퀴꽃은 잿빛으로 변한다. 꽃잎은 떨어져 천이 주변에 눈보라처럼 흩날리다가 어머니를 따라 사라진다.

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하고 소설가로 데뷔한 이평재는 이 작업을 ‘아트픽티오’(Art fictio)라고 스스로 명명했다. 픽티오란 라틴어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뜻이다. ‘엉겅퀴 칸타타’는 이런 개념으로 월간 ‘문학사상’에 2012년 1년간 연재한 내용을 다듬고 보탠 결실이다. 이씨는 “부모가 잇달아 타계하고 가까운 이마저 암으로 투병 중이어서 근년에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면서 “그동안 들려 있던 죽음이라는 화두를 정리하는 소설이지만 올해 고희를 맞은 스승에게 바치는 헌정작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잿빛 꽃잎으로 흩날리는 엉겅퀴 그림 속으로 스며들어 글로 만든 사랑과 죽음의 칸타타를 듣는 일, 썩 괜찮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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